다정함에 대한 착각[정덕현의 그 영화 이 대사]〈93〉

  • 동아일보

“다정함을 약함으로 착각하지 마.”

―샘 레이미 ‘직장상사 길들이기’

‘직장상사 길들이기’라는 제목만 보면 꼭 오피스 배경의 로맨틱 코미디 같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이 B급 호러 ‘이블 데드’로 유명한 샘 레이미 감독이라는 사실은 이것이 일종의 ‘연막’이라는 걸 실감케 한다. 무인도를 배경으로 피 칠갑을 한 채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직장인 출입증을 쥐고 있는 포스터가 그걸 말해 준다.

물론 시작은 오피스 드라마처럼 문을 연다. 임원 승진을 앞둔 린다(레이철 매캐덤스)는 신임 사장 브래들리(딜런 오브라이언)로부터 절망적인 승진 거부 통보를 듣게 된다. 골프 같은 사교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들지만, 알고 보면 외모와 성차별 때문이다. 그런데 출장 도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외딴 무인도에 단둘이 고립되면서 이야기는 급선회한다. 야생에 익숙한 린다와 그런 곳에서 단 하루도 못 버티는 ‘샌님’ 브래들리의 권력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린다의 눈치를 봐야 생존할 수 있지만 역전된 권력 구도가 익숙지 않은 브래들리는 먹을 것을 챙겨주며 다정하게 대하는 린다를 어떻게든 무너뜨리고 그 권력을 쥐려 한다. 그래서 반역(?)을 시도하지만 린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피비 케이츠의 ‘파라다이스’나 브룩 실즈의 ‘푸른 산호초’ 같은 작품이 무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야생의 로맨스를 그려냈다면,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그 다정함이 오가는 눈빛 속에 살벌한 핏빛 권력 대결의 날을 세워놓았다. “다정함을 약함으로 착각하지 마.” 린다가 브래들리에게 하는 이 경고의 말은 그래서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게 한다. 누군가에게 다정한 것이 약함으로 치부되는 사회, 공격적인 말들이 강함으로 오인되는 사회가 그것이다. 특히 날 선 말들이 오가는 정치권이 귀 기울여야 할 말이 아닐까 싶다.

#직장상사 길들이기#샘 레이미#무인도#권력 관계#성차별#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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