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기억하는 세 번의 아픔[김창일의 갯마을 탐구]〈50〉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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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침몰된 여객선에서 생존한 해녀를 추적하다가 참담한 사실을 알게 됐다. 가덕도 노인들에게 기억나는 과거 사건을 물었더니 너나없이 ‘한일호 침몰’을 들었다. “방파제와 해변가 몽돌밭에 수십 구의 시신이 누워 있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00명이 넘게 탔는데 12명만 살았어요. 그날은 겨울바람이 매서웠고 파도가 높았는데 몇 시간을 헤엄쳐서 생존한 건 기적입니다. 그중에 해녀가 4명이 있었는데 겨울 물질에 단련이 돼서 살았어요”라고 노인들은 입을 모았다. 필자는 1967년 침몰한 한일호의 기막힌 사연을 접하고 경악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967년 1월 14일, 부산과 여수를 오가던 정기 여객선 한일호(140t)는 승객 108명과 선원 13명을 태우고 여수를 출발했다. 부산 가덕도(당시 경남 창원군 천가면) 서북방 해상에서 해군 구축함인 충남73함(1900t)과 충돌했다. 목선인 한일호는 크게 파손돼 10분 후 침몰했고, 승객 90여 명이 사망했다. 사고 조사 과정에서 1953년 침몰한 창경호(147t) 엔진을 재사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창경호는 미군 폭격으로 침몰한 천산환(天山丸)을 인양해 재사용한 배였다. 즉 일제강점기 때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오가던 연락선인 천산환을 군수선으로 오인한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했는데 그 선체를 인양하여 재사용한 배가 창경호였다. 창경호 역시 1953년에 침몰해 수백 명의 승객이 사망했다. 창경호 엔진은 한일호에 재사용돼 또다시 침몰한 것이다. 참혹한 사고가 천산환에서 창경호, 한일호로 되풀이됐다.

다대포 향토사학자인 한건(78)은 창경호가 침몰한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창경호가 침몰한 다대포 앞바다는 화손대와 고리섬 사이의 화준구미라는 좁은 해협입니다. 이순신 함대가 부산포와 다대포를 점령한 왜군을 격퇴하기 위해 부산으로 향하다가 이 지점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물살이 세고 강풍이 부는 곳이죠. 창경호는 침몰 후 한참이 지나서 인양했는데 행방불명된 승객들이 선체에서 인골로 발견됐어요.” 부산∼여수 정기여객선인 창경호 침몰(1953년 1월 9일)에 따른 사망자는 승객 명부에 기재된 수를 웃돌았고, 유실된 시신을 합치면 사망 인원은 300명이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됐다. 정원 초과와 과적 상태에서 큰 파도에 부딪힌 것이 사고 원인으로 지목됐다. 여객선에는 구명장비조차 구비돼 있지 않았는데 도난을 우려해 회사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단다.

공군기의 폭격(천산환), 과적과 파도(창경호), 군함과의 충돌(한일호)이라는 침몰 원인은 달랐으나 여객선 개조와 정원 초과, 과적, 안전장비 미비 등에 따른 희생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비운의 한일호’라는 대중가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차가운 북동풍이 몰아치는 밤 목멘 고함소리/울지도 못하고 그 순간 앗아갔네 수많은 생명….” 가덕도에서 내려다보는 부산 신항은 세계 3대 컨테이너항을 꿈꾸며 엄청난 규모로 확장해 가고 있고, 초대형 선박은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다. 평화롭게 빛나는 바다는 과거의 아픔을 지웠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날의 비극은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였음을.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침몰#여객선#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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