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의 반란이 시작됐다[오늘과 내일/신연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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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말도 못 꺼낸 성희롱과 갑질
당당히 항의하는 젊은이들 응원한다

신연수 논설위원
신연수 논설위원
벌써 세 번째다. 안희정 오거돈 때도 충격이었지만 박원순 시장의 경우는 할 말을 잃게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사람들이 가장 약한 처지에 있는 비서에게 권력형 성범죄를 저지른 일은 ‘진보의 위선’으로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어쩌면 올 것이 왔는지도 모른다. 잇따른 권력형 성추행은 개인의 일탈을 넘어 사회에 만연한 비(非)민주성을 보여준다. 과거 독재정권이나 이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권이나 여성들 위에 군림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붙잡히면 고문당하고 투옥되는 독재정권 아래서 운동권 역시 ‘조직’이 우선이었다. 여성의 희생은 당연시됐고 개인의 권리는 무시됐다. 1987년 이후 한국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달성했지만 직장과 가정, 학교 같은 생활 속에서의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했다.

여성이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로든 신체적으로든 성희롱을 한 번도 안 당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남녀차별이 비교적 적다는 언론사들에서도 과거 젊은 여기자들은 회식 때 부장이나 임원, 출입처의 장 옆에 앉아야 했고, 노래방에 가서 상사들과 블루스를 춰야 한 적도 있다. 언론사뿐 아니라 많은 회사들이 그랬다.

지금 언론들이 박 시장과 그를 감싼 서울시 관계자들을 비난하지만, 언론사 간부들은 그동안 여성 직원들을 존중했는지, 성희롱 문제를 제기한 여성에게 “참아라”라고 한 적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서울시에서는 여비서가 시장의 속옷 수발을 들고 혈압을 재는 등 성차별과 성희롱적 발언이 일상이었다는데 과연 서울시만 그랬을까. 그보다 더한 공공기관과 민간기업들이 지금도 많을 것이다. 박 시장의 비서는 4년간 20명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모두 묵살당했다니 그 폐쇄성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권력에 의한 성범죄는 성문제에만 초점을 맞출 일이 아니다. 직장 갑질에 관대한 문화가 근본이다. 피라미드 같은 계급사회에서 사장은 임원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임원은 과장의 머리를 결재판으로 내리치며, 과장은 직원에게 “치마 입은 다리가 예뻐” 하며 희롱하는 것이 한국 사회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할 말을 못 하는 분위기, ‘중요한 일’을 하는 윗분의 심기를 보좌하기 위해 아랫사람이 참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권력형 성범죄를 조장한다.

그래도 최근 몇 년간 벌어진 일들은 한국이 드디어 거대담론을 넘어 생활 속 민주주의의 도도한 흐름에 들어섰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2014년 대한항공 직원들이 ‘땅콩 갑질’을 폭로한 데 이어 대림산업과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엽기 갑질’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고발, 문화계 원로 고은 시인과 이윤택 연출가에 대한 성폭력 폭로, 국민배우 이순재 씨의 매니저 갑질 논란 등 을(乙)들의 반격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

박 시장 사건을 접하고 “그렇게 목숨까지 버려야 했나” 하는 충격과 안타까움, 그럼에도 고인을 변호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허우적대는데 피해자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쳤다.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이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내려놓았다.” 똑 부러진 그의 질타에서 우리 사회가 진보하고 있음을 느낀다. 어떤 고매한 이상과 높은 권위를 내세우더라도 개인의 인권을 짓밟아선 안 된다는, 당연하지만 실현되지 않았던 명제를 온몸으로 실행하는 젊은이들이 자랑스럽다. 박 시장을 고소한 분도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용기를 낸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을들이여 더는 참지 마시라. 지금은 고통스럽더라도 당신들의 용기가 좀 더 인간답고 평등한 세상을 앞당길 것이다. 곳곳에서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는 이 사회의 을들을 응원한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박원순 전 시장 성추행 의혹#권력형 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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