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나 커피부터 K-POP까지…냉랭한 관계에도 한류 열풍 ‘후끈’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26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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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 일본 도쿄 시부야. 거리 한 복판에 자리한 작은 카페 앞에 너덧 명의 여성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16㎡(5평) 남짓한 이 카페는 올해 3월 국내 한 달고나 커피 전문점 이 도쿄에 매장을 낸 일종의 해외 체인점이다.

카페에서 만난 대학생 야마모토 아미 씨(22)는 자신을 7인조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팬이라고 밝혔다. 그는 “BTS 멤버들이 달고나 커피를 마시는 영상을 보고 이 곳에 왔다. 1주일에 최소 3~4번은 달고나 커피를 즐긴다”고 했다.

●‘긴급 사태’ 때 달고나 커피 마신 日 젊은층
최근 일본 젊은이 사이에서 달고나 커피 인기는 그야말로 뜨겁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이를 일본어로 표기한 ‘ダルゴナ’가 인기 검색어로 자주 등장한다.

남성그룹 ‘에그자일(EXILE)’ 멤버 나오토(37), 여성 아이돌그룹 ‘AKB48’ 출신 배우 시마자키 하루카(島崎遙香·26), 한국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5인조 아이돌 그룹 ‘스맙(SMAP)’의 전 멤버였던 배우 구사나기 쓰요시(草彅剛·46) 등 톱스타들도 잇따라 유튜브에서 달고나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방송을 선보였다.

이날 찾은 시부야 매장은 매장 내 공간이 없는 테이크아웃 전문점이다. 종업원도 단 1명.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새도 없이 출입문을 나서야 하지만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개장을 기다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도 달고나 커피의 인기에 한몫했다. 3월 28일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의 외출 자제 요청, 4월 6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긴급사태 발령 등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적잖은 젊은이들이 유튜브를 보며 달고나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

2000년대 초 드라마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1차 한류, 2000년대 후반 케이팝(K-Pop)이 일으킨 2차 한류 등 과거와 달리 최근 한류는 문화 콘텐츠를 넘어 일본 젊은이들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라이프스타일 한류’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달고나 커피 외에도 치즈닭갈비, 치즈핫도그 등 ‘케이푸드(K-Food)’가 각광받는 모습이 뚜렷하다. 권용석 히토쓰바시(一橋)대 교수는 “한류 붐이 일어난지 20년 가까이 되다보니 이제 한류가 새로운 현상이나 유행이 아니라 일본인의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정착하는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우익도 한드 애청…지상파→넷플릭스로
한류의 전통 강자였던 한국드라마(한드)는 올해 초 방영된 재벌 상속녀와 북한 장교의 사랑 이야기 ‘사랑의 불시착’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4월 일본 넷플릭스의 인기 콘텐츠 순위 TOP3에 진입한 이 작품은 6월 현재도 이 순위를 지키고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더 킹:영원의 군주’ 같은 한국 드라마 역시 넷플릭스 TOP10 안에 포진하고 있다.

1988년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9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마지막 황제’ 주제가를 만든 유명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68)는 최근 ”가장 즐겨 보는 드라마가 사랑의 불시착“이라고 밝혔다. 도쿄 신주쿠에서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외출 자제 중 빠진 한국 문화’란 토론회도 열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위안부 제도가 필요했다’ 등 각종 혐한(嫌韓) 발언으로 유명한 극우 정치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51) 전 오사카 시장조차 팬을 자처했다. 그는 11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호기심에 1, 2회 정도 보려했으나 한 번 보는 순간 16회까지 전 편을 봤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랑 이야기는 물론이고 남북 관계 등 최근 화제가 되고 유행이 될 만한 요소가 다 있었다“고 호평했다.

일본에서는 이 드라마가 북한을 소재로 삼았다는데 주목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제작진이 북한 생활 실태와 사회적 관습에 대해 조사하는 등 철저한 고증을 기했다“고 평했다. 최근 북한의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 등 한반도 긴장 상황이 높아진 후 아베 총리가 ”적군의 미사일 기지 등을 타격할 수 있는 ‘적기지 공격 능력’ 확보를 위한 논의를 본격화하겠다“고 밝히는 등 일본 사회 전반에서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심이 여전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일본 시청자가 한드를 소비하는 플랫폼이 공중파에서 넷플릭스로 바뀐 것 또한 한류 열풍에 일조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겨울연가’가 대표하는 1차 한류가 공영방송 NHK에서 시작됐다면 지금은 넷플릭스라는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이 대세가 됐다는 의미다. 한드의 주 시청자도 공중파를 즐겨보는 중장년층에서 1020 세대로 대폭 낮아졌다.

황선혜 한국콘텐츠진흥원 일본비즈니스센터장은 ”세계 각국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가 선전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콘텐츠의 작품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대형 레코드점 한 층 전체가 K팝 매장
K팝의 인기도 여전하다. 시부야 한복판에는 면적 5123㎡, 8개 층의 대형 음반매장 ‘타워레코드’가 있다. 지난해 리모델링을 하면서 5층 전체를 K팝 매장으로 꾸몄다. 타워레코드 측은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K팝 팬들의 열렬한 요청으로 공간을 늘렸다. 10년 전 처음 K팝을 듣던 일본 젊은이들이 부모가 되어 자녀와 함께 음반을 사고 있다“고 소개했다.

24일 기자가 이 곳을 찾았을 때 BTS, 트와이스, 엑소 등 국내 아이돌그룹의 한국어, 일본어 발매 앨범이 가수별로 전시돼 있었다. 특히 트와이스의 미니 앨범 ‘모어앤드모어’ 등 한국 가수의 최신 한국어 앨범도 수입돼 마치 한국 음반점을 방불케 했다.

BTS가 2월 발표한 한국어 정규 4집 ‘맵오브더솔:7’은 상반기(1¤6월) 일본에서 42만9000장이 판매됐다. 일본 가수를 포함해 상반기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해외 가수가 상반기 앨범 판매량 1위를 기록한 것은 1984년 마이클 잭슨의 2집 ‘스릴러’ 이후 36년 만이다.

일본 음악계의 K팝 배우기 열풍도 뜨겁다. 3월 데뷔한 11인조 남성 아이돌 ‘JO1’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끈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 제작진이 일본에서 만든 그룹이다.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의 역시 일본인으로 구성된 K팝 걸그룹을 만드는 ‘니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나바타 도시야(名畑俊哉) 오리콘 부사장은 ”한국 가수들은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 이용도 일본 가수보다 활발하다. 이들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콘텐츠를 전달하며 일본 젊은층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일본 젊은층이 늘어나 한국어 강의 동영상도 덩달아 인기다. 그는 향후 K팝을 굳이 ‘K팝’이라 지칭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전 세계에서 범용 음악 콘텐츠가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출판 한류도 열기
출판 한류도 새 지평을 열고 있다. 지난해 7월 일본에서 번역 출간된 손원평 작가(41)의 소설 ‘아몬드’는 최근 7만6000부를 찍었다. 올해 4월 아시아권 소설로는 처음으로 일본 서점대상 번역소설상을 수상하면서 불과 2개월 만에 4만 부가 넘게 팔렸다. 전문가들은 올해 안에 일본에서만 10만 부 판매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승복 일본 K-BOOK진흥회 사무국장은 ”‘아몬드’의 일본 서점대상 수상은 한국 문학의 저변이 탄탄함을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3월 일본에서 출간된 김수현 작가의 에세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는 2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역시 15만 부 이상 판매됐다. 한일 여성의 우정을 다룬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 등도 일본 출판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 문학을 해외로 수출하는 에이전시 ‘KL매니지먼트’의 이구용 대표는 ”한국 드라마와 가요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한국 출판물에 대한 친밀도도 증가했다“고 출판 한류의 배경을 설명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역시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정국이 읽은 책으로 알려지면서 일본 젊은 독자들에게 큰 화제를 보았다. 김 작가의 신작 에세이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는 최근 2억2000만 원에 일본 출판사와 판권 계약을 맺었다. 일본에 수출된 국내 서적으로는 최고가다.

한국 문학에 대한 일본 독자들의 정서적 공감대도 출판 한류의 요인으로 꼽힌다. 지리적으로 인접했을 뿐 아니라 고령화, 저출산, 성차별, 교육 등 한국 문학에 등장하는 사회 문제에 일본 독자 역시 큰 공감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82년생 김지영’을 펴낸 지쿠마쇼보 출판사에 따르면 많은 일본 독자들이 ”내 이야기‘라고 느꼈다“ ”일본인에게도 읽힐 책“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과거보다 정치 영향도 덜 받아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서 당시 K팝이 주도하던 한류는 큰 타격을 받았다. 지난해 7월 일본의 반도체 수출 규제 등으로 양국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정치 상황이 한류 열풍에 영향을 끼치는 시대는 지났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2018년 11월 BTS의 한 멤버가 사석에서 원폭 사진이 담긴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TV아사히의 대표 음악 프로그램 ’뮤직스테이션‘ 측은 BTS의 생방송 출연 하루 전 일방적으로 취소를 통보했다. 같은 해 도쿄돔에서 열린 BTS 콘서트 때도 일부 우익이 ”BTS 음악을 듣지 말라“고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이달 15일 극우 산케이신문 계열 방송인 후지TV를 시작으로 NHK 등 지상파 방송들은 잇따라 BTS를 초빙하고 있다. TV도쿄는 다음 달 5일 BTS를 위한 1시간 특별 방송까지 편성했다.

일본 문화청 문화부장을 지낸 데라와키 겐(寺脇硏) 교토조형예술대 교수는 ”양국 정부 사이가 나쁘다고 두 나라 국민들의 문화 교류가 지장을 받는 시대는 지났다. 특히 한류를 적극 소비하는 젊은층이 정치와 문화를 구분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여론조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일본 내각부가 18세 이상 일본 성인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에 친근함을 느낀다“는 응답은 26.7%로 조사를 시작한 1978년 이후 42년 최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현재 한류 콘텐츠를 주로 소비하는 18~29세의 45.7%는 ”한국에 친근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일본 전체 평균과 약 20%포인트 차이가 났다.

도쿄=김범석 특파원bsism@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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