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사이토 총독은 뱀의 혀를 놀려 조선인 기만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7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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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07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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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울분은 이국땅 유학생들도 매한가지였습니다. 특히 일본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독립을 선언해 3·1독립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고, 그로부터 1년 5개월 뒤인 1920년 7월, 여름방학을 이용해 고국 순회강연회를 엽니다. 참뜻은 ‘세계 개조(改造)의 기운’을 널리 알려 자유와 독립심을 심어주려는 것이었지만 허가를 받기 위해 ‘평소 배운 학술지식을 피력하겠다’는 걸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런데도 총독부는 바짝 긴장했습니다. 18명의 연사 가운데 김도연 윤창석 이종근 등 2·8독립선언의 주역들이 다수 포함돼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 강연이 아니라 문화행사다”, “법을 꼭 지키겠다”고 약속해 겨우 성사됐습니다.

강연회는 7월 9일 동래를 시작으로 부산, 김해, 밀양, 대구, 경주, 공주, 청주 등을 거쳐 18일에는 경성에서 개최됐습니다. 학우회의 충정에 깊이 공감해 순회강연회를 후원한 동아일보는 연일 이들의 동정과 강연 일정을 소개했습니다. 단성사에서 열린 경성 강연회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7월 19일자 기사 중에는 오후 1시에 시작된 행사에 오전부터 수천 명이 몰렸다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흰 옷 입은 사람의 물결이 마치 어느 때, 무슨 광경을 연상할 만했다’고 표현했습니다. 행간(行間)에 3·1독립만세운동을 녹여낸 겁니다.

경성 강연회의 첫 테이프는 강연단장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김준연이 끊었습니다. 훗날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필을 지낸 그는 세계 개조의 흐름을 소개하며 러시아혁명과 독일·오스트리아 제국의 패퇴 등을 거론합니다. 비록 학술행사였지만 혁명이니, 제국주의의 패망이니 하는 얘기는 일제로서는 껄끄럽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그는 이어 “현재 세계를 풍미하는 개조의 초점은 정신적·물질적·인격적 자유의 완전한 획득”이라며 조선 민중의 자유를 송두리째 앗아간 일제를 겨냥했습니다.

1920년 7월 18일 경성 단성사에서 열린 유학생 학우회의 순회강연을 듣기 위해 몰려든 청중들.
1920년 7월 18일 경성 단성사에서 열린 유학생 학우회의 순회강연을 듣기 위해 몰려든 청중들.



그 전 지방 강연회 때보다 한층 높아진 발언 수위에 어쩔 줄 모르던 일본 경찰은 2·8독립선언을 주도한 게이오대학 김도연이 두 번째로 연단에 오르자 이내 강연을 중단시키고 청중을 해산시킵니다. 이날 사회를 맡은 동아일보 주간 장덕수와 연사들이 이유를 캐묻자 종로경찰서장은 “나는 강연단에 경의를 표하지만, 상급관청의 명령에 따라 보안법 제2조에 따라 해산한다”고 간신히 내뱉습니다. 당시 조선민중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원천봉쇄한 보안법 2조는 ‘경찰관은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집회, 다중의 운동이나 군집의 제한·금지·해산을 명할 수 있다’고 돼있었죠.

총독부는 경성 강연회 외에도 줄줄이 계획돼있던 강연일정을 모두 취소시켰을 뿐 아니라 강연단 단원이 한 명이라도 참가하는 다른 강연 역시 금지했습니다. 경성부(府)의 상급 행정기관인 경기도가 발표한 이유를 보면 일제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납니다. 즉, 온건한 문화선전을 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반어(反語), 은어(隱語)와 풍자로 교묘하게 조선독립을 얘기하고 △타국의 예를 들어 불온사상을 선동했으며 △연사를 독립운동(2·8독립선언) 지사라고 소개하고 △창가(唱歌)를 연주해 군중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겁니다.

경성 강연회 도중 일경에 의해 강제 해산된 강연단 일행. 이 가운데 상당수는 1919년 2·8독립선언의 주역이었다.
경성 강연회 도중 일경에 의해 강제 해산된 강연단 일행. 이 가운데 상당수는 1919년 2·8독립선언의 주역이었다.


동아일보는 종로경찰서장이 해산이유를 취재하는 기자에게 “특별히 어떻다는 건 아니고, 회장에 모인 청중의 공기가 불온하고…”라고 얼버무리자 이를 보도하면서 ‘공기를 단속하는 경관’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사흘 뒤인 7월 22일자 1면 사설 ‘학우회 순회강연단 해산명령과 언론압박’에서는 경기도가 든 해산 이유를 조목조목 반박한 뒤 사이토 총독을 향해 “가식과 허위로 무차별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모두를 평등하게 대해 똑같이 사랑함)이니 선정(善政), 덕정(德政)이니 뱀의 혀를 놀려 조선인을 기만하지 말라”고 꾸짖어 총독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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