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꿈을 위해 날아오른 탄광촌 소년, ‘빌리’라는 희망이 떠난 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21일 14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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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엘튼 존의 삶을 다룬 음악 영화 ‘로켓맨’을 보다가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엘튼 존의 평생친구이자 그의 명곡들의 가사를 쓴 버니 토핀 역의 제이미 벨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나 피터잭슨 감독의 ‘킹콩’으로도 익숙한 얼굴이지만, 무엇보다 10대의 나이로 영화‘빌리 엘리어트’ 주인공 역으로 데뷔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배우 아니던가. 그는 이 데뷔작으로 기라성 같은 성인 배우들을 제치고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한 번 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0년 전 겨울, 지금은 사라진 종로2가의 극장에서 이 낯선 소년의 얼굴을 보았던 기억이 로켓맨을 보면서 떠올랐다.

11살 소년 빌리는 역사상 가장 긴 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1980년대 영국 북부 광산촌 더럼에서 엄마를 여의고 광부 아버지와 형, 그리고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 대처 총리가 석탄산업 민영화 정책을 강행하는 것에 노조는 장기파업으로 맞서고 빌리의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도 이 싸움에 함께 한다.

남자 아이들은 복싱을 배우고 여자아이들은 발레를 하는 마을, 매일 가는 체육관에서 우연히 발레수업을 보게 된 빌리는 매일 배우는 복싱 대신 토슈즈를 신고 춤추는 발레에 사로잡힌다. 그의 재능을 발견한 발레교사 윌킨슨 부인은 아버지 몰래 빌리에게 춤을 가르치고 “남자는 레슬링이나 복싱을 하는 거고 발레는 게이나 하는 것”이라 믿는 무뚝뚝한 아버지를 설득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예술적 재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나 고통이기도 하다. 평생 광부로 살았고, 지금은 대처 정권으로부터 고통 받는 아버지는 재능을 넘어서는 아들의 절박한 꿈을 이제 응원하기로 한다. 촌뜨기 아버지와 아들은 로얄발레학교의 아름다운 위용에 주눅 들지만, 빌리는 “춤을 출 때 어떤 생각이 드냐”는 심사위원 선생들 앞에서 처음으로 더듬거리며 말한다. “모르겠어요. 그냥 기분이 좋아요.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모든 걸 잊게 되고… 그리고 사라져버려요. 내 몸 자체가 변하는 기분이예요. 마치 몸속에 불이라도 치솟는 느낌이에요…….”

결국 빌리 엘리어트는 불우한 환경을 딛고 천재적 재능을 키워 결국에는 꿈을 이룬다는 성공스토리인가. 이 영화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대처로 대표되는 보수정권을 줄기차게 까대는 영화 속 광부들은 생존을 위해 오래오래 싸운다. 빌리가 합격통보를 받은 날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 동료들에게 달려가지만 동시에 광부들의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빌리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드디어 런던 행 버스를 타고 떠나는 장면과 아버지와 형이 다시 어두운 갱도 속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교차된다. 빌리는 비상하고 아버지와 형은 전락한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광산 엘리베이터가 갱도를 향해 수직으로 하강하는 모습과 빌리가 자신의 꿈을 위해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평행 편집하면서 이 영화가 마냥 꿈을 찬양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이야기가 아님을 역설한다.

빌리라는 희망이 떠난 후,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가르친 윌킨슨 부인은 쓸쓸한 모습으로 체육관에 남는다. 빌리와 마음을 나눴던 게이소년 마이클도 마찬가지다. 빌리의 재능이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구원하진 않는다. 천재의 재능은 이렇게 희열과 회환을 동시에 안긴다.

빌리의 육체와 춤의 전시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편 주어진 삶 앞에 솔직하고 선했던 사람들의 일상과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이 영화는 종국엔 한 사람의 성공스토리 이상의 미덕을 뿜어낸다. 수년이 흐른 후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아버지와 형은 빌리의 ‘백조의 호수’를 보러 런던에 간다. 자꾸 뒤쳐지는 늙은 아버지를 형은 재촉하고, 가까스로 앉은 객석 옆에는 빌리의 오랜 게이친구 마이클이 그의 애인과 함께 와있다. 영화 역사에 남을 명장면, 빌리의 마지막 도약에서 우리는 어느덧 누군가에게 주어진 놀라운 재능이 우리의 삶을 위로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빈부차이와 계급의 차이, 젠더의 차이들이, 그들 앞에 놓여진 삶의 숙제에 충실하고 솔직했으므로 위로 받고 존중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도약의 이미지로 완성한다.

영국 글램록의 전설 티렉스의 노래로 시작하는 빌리 엘리어트는 시퀀스마다 넘쳐나는 음악의 향연들로 채워진 뛰어난 음악영화이자, 발레뿐만 아니라 부기댄스, 탭댄스 등 다양한 춤들이 소박한 풍광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춤 영화이기도 하다. 비록 단 한 장면이지만, 성년이 된 빌리 역의 아담 쿠퍼의 압도적 카리스마를 만날 수 있는 것도 큰 기쁨이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이후 감독 스티븐 달드리, 매튜 본, 그리고 엘튼 존에 의해 세계적인 뮤지컬로 거듭났다. 그때의 인연이었을 제이미 벨을 20년이 지나 다른 영화로 다시 만나게 된 감회로 이 글을 썼다.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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