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후손이 독립유공자 발굴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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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110명… 17년간 25명 자료 찾아내 포상 신청
자료실 만들어 유공자 선양사업도

윤치홍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사무국장(가운데)이 3·1절 100주년 여수지역 행사에 참석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제공
윤치홍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사무국장(가운데)이 3·1절 100주년 여수지역 행사에 참석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제공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다니던 윤형숙(1900∼1950)은 1919년 3월 10일 군중의 맨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행진하는 군중을 향해 일제는 총검을 휘두르며 해산을 시도했다. 당시 윤형숙은 일본 헌병이 휘두른 군도(軍刀)에 왼팔을 잃었다. 유혈이 낭자했지만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다시 오른손으로 주워 들고 일어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됐다. 윤형숙이 ‘조선의 혈녀’이자 ‘남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이유다.

윤 열사는 일제에 의해 4년간 격리 수용되는 고초를 겪었다. 석방 이후 가시밭길을 걸으며 교회 전도사와 교사로 국민계몽운동, 반공청년운동을 했다. 1950년 여수까지 점령한 인민군에 붙잡혀 총살을 당했다.

윤 열사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조카인 윤치홍 씨(79)의 공이 크다.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윤 씨는 17년간 고모인 윤 열사를 비롯해 독립유공자 25명을 발굴해 포상을 받게 했다. 여수지역 독립유공자 44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유공자를 찾아낸 것이다. 유족회는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이봉금 정영한 박창래 등 3명의 자료를 발굴해 서훈을 받는 데 도움을 줬다.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이던 이봉금(당시 15세)은 광주 만세운동 당시 체포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정영한은 1928년부터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알리는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박창래는 1930년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 독립운동 비밀단체인 독서회를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는 독립유공자 후손 110명이 회원이다. 이처럼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조상의 항일운동 흔적을 발굴해 포상을 신청하는 것은 전국적으로 드문 사례다.

유족회를 이끌고 있는 윤 씨는 2002년부터 17년 동안 정부 포상을 받지 못한 여수지역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그가 발굴을 시작한 것은 독립유공자인 할아버지 윤자환(1896∼1949)과 고모 윤형숙의 정부 포상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천도교인이었던 윤자환은 1919년 3월 2일 독립선언서를 여수경찰서와 순천시 해룡면 면사무소 게시판에 부착했다. 전남에서 처음으로 3·1운동을 펼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해 농사일조차 못할 정도여서 생활고까지 겪었다.

윤 씨는 “어릴 적 할아버지와 고모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듣게 됐다”며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 뒤늦게 두 분의 독립운동 자료를 발굴해 정부 포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윤 씨는 이를 계기로 여수지역 독립운동가를 찾는 일에 주력했다. 이후 2006년 다른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함께 유족회를 결성했다. 유족회는 보훈단체로 등록되지 않아 예산을 지원받지 못했다. 여수시는 지난해 9월 웅천동 보훈회관 3층에 독립운동가 발굴 자료실을 개설해 유공자 선양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윤 씨는 “10여 년 전에 독립유공자 후손을 찾아가면 일부에서는 사기꾼으로 의심하기도 했다”며 “최근에는 개인정보 보호규정이 강화돼 독립운동가 자료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한 분이라도 더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독립유공자 후손#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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