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소득도 희망도 하위 1%… 美 빈곤층의 ‘시궁창 인생’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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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J.D.밴스 지음·김보람 옮김/428쪽·1만4800원·흐름출판

저자처럼 무너진 가정에서 가난에 짓눌리며 자란 유명 래퍼 에미넘. 동거하는 남자들과 수시로 격렬하게 싸우는 어머니 때문에 저자는 
지뢰밭에서 사는 것 같았다고 털어놓는다. 론 하워드 감독은 ‘힐빌리의 노래’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DB
저자처럼 무너진 가정에서 가난에 짓눌리며 자란 유명 래퍼 에미넘. 동거하는 남자들과 수시로 격렬하게 싸우는 어머니 때문에 저자는 지뢰밭에서 사는 것 같았다고 털어놓는다. 론 하워드 감독은 ‘힐빌리의 노래’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DB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영화 ‘8마일’의 주인공 지미가 토해낸, 유명한 대사다. 유명 래퍼 에미넘이 지미로 출연해 자신의 실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저자는 ‘시궁창 현실’이 무엇인지 처연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힐빌리는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의 쇠락한 공업 지역인 러스트(Rust·녹) 벨트에 사는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디트로이트에서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어머니와 트레일러 집에 사는 지미, 오하이오에서 약물 중독자인 어머니에게 학대받으며 때로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던 저자의 삶은 전형적인 힐빌리의 그것이다.

저자는 양육권을 포기한 친아버지 대신 초등학생 때부터 한 해가 멀다 하고 여러 남자를 아버지로 만났다. 밥, 칩, 스티브, 맷, 캔…. 이들 아저씨의 집으로 이사를 다니는 인생이 이어진 것. 약물에 찌든 간호사인 어머니가 간호협회에서 실시하는 약물 검사에 내야 한다며 아침부터 아들에게 소변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건 수많은 상처 가운데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런 유년기를 보낸 저자는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너무나 동떨어진 두 세계를 어떤 사다리를 타고 어떻게 이동했는지 궁금한가. 드라마틱한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야기의 무게 중심은 성공담보다는 학습된 무기력에 젖어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힐빌리의 현실을 비추는 데 있다.

힐빌리에게서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술과 약물에 찌들고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걸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나마 누나와 이모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건 힐빌리가 아닌 다른 문화의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이란다.

러스트 벨트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역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민주당 지지자였던 이들이 돌아선 이유를 알 수 있다. 노동의 가치를 믿던 이들은 일찍 일어나는 게 싫어 회사를 그만두고, 푸드 스탬프로 받은 음식을 팔아 술과 담배를 즐기는 ‘복지 여왕’들을 보며 환멸을 느꼈다. 그 결과 미국 정치 엘리트들과 현 체제를 불신하게 된 것.

저자가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자녀는 방치했지만 손자만은 제대로 키우려 애썼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덕분이었다. 해병대 지원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됐다.

오하이오주립대를 졸업한 후 예일대 로스쿨에 간 그는 연일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지금 아내가 된 로스쿨 친구 우샤의 집에 갔을 때 가족들이 소리 지르지 않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그랬다. 로펌 입사 면접을 위한 연회장에서 ‘탄산수(Sparkling Water)’를 처음 보고 ‘반짝거리는 물’이 뭔지 몰라 한 모금 마시고 역겨워 내뿜는 모습에서는 올해 33세인 그가 얼마나 다른 세상에서 살았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힐빌리의 삶은 미국의 빈곤층에 드리운 짙은 그늘을 영화처럼 세밀하게 조명한다. 그리고 그 그늘을 걷어내는 방법에 대한 현실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국 빈곤층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남자의 흥미로운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서 그가 걸어온 궤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힐빌리에게 당부한다.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을 바꿔야 한다”고. 손자를 이렇게 키워낸 외할머니는 늘 외쳤다. “절대 자기 앞길만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빌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 원제는 ‘Hillbilly Elegy’.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힐빌리의 노래#j.d.밴스#에미넘#8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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