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계천에서 전파사를 운영하며 두 자녀를 키우던 양모 씨(59)는 2009년 사업이 망한 뒤 어렸을 때 앓았던 조현병(정신분열증)이 도로 심해졌다. 정신병원 입원 생활이 7년간 이어졌다. 아내가 지난해 5월 이혼소송을 내자 양 씨는 무연고자가 됐다. 병원이 입원비를 댈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양 씨를 쫓아내면 경찰은 교통질서 위반 등으로 다시 붙잡아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키길 되풀이했다. 올해 2월 한 사회복지법인이 양 씨의 후견인으로 지정됐을 때 그는 폐렴까지 얻어 심신이 극도로 피폐한 상태였다.
보건복지부가 양 씨처럼 기댈 곳 없는 정신질환자나 치매 환자들에게 ‘공공후견인’을 붙여주는 방안을 도입하기로 한 것으로 7일 확인됐다. 공공후견은 질병이나 장애, 노령 탓에 의사결정이 어려운 사람에게 법원이 법적 후견인을 정해줄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제도다.
2013년부터 연간 200여 명의 발달장애인이 공공후견제도에 따라 후견인 활동비(월 15만 원)를 지원받고 있지만 정신질환자와 치매 환자는 방치돼 왔다. 이 때문에 무연고 정신질환자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상태가 악화되거나 재산을 노린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사례가 많았다. 최근 경찰에 특수감금 등 혐의로 구속된 박모 씨(57) 일당은 조현병 환자 A 씨(67)가 결혼한 것처럼 꾸며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킨 뒤 재산 50억 원을 뜯어내는 수법을 썼다.
복지부는 전국 정신요양원 59곳에 입소한 1만477명 중 가족이 없는 500여 명을 우선 추려 자격 심사를 거친 뒤 공공후견인을 정해주기로 했다. 후견인은 환자의 입·퇴원 결정과 재산 관리를 돕고 사회 복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 지난달 30일 시행된 개정 정신건강복지법에는 후견인이 반대하면 가족(보호의무자)이 정신질환자를 강제 입원시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됐다. 공공후견제도가 자리를 잡으면 환자의 먼 친척이나 ‘가짜 가족’이 강제 입원을 재산 문제 등에 악용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치매에 걸린 홀몸노인에게 공공후견인을 안내하는 제도는 이미 시범사업에 착수했다. 복지부는 다음 달 저소득층 치매 노인 10명에게 공공후견인을 정해준 뒤 수요를 파악해 내년부터 전국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10만2700여 명으로 추정되는 전국 치매 홀몸노인 중 적어도 3만 명이 혜택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공후견인은 정년퇴직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위주로 교육한 뒤 공공일자리 인력은행에 등록시켜 필요시 파견하는 형식으로 운용한다.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된 2013년 7월 이후 지난해 9월까지 후견인을 지정받은 치매 환자는 약 800명에 불과하다.
다만 증상이 얼마나 심한 환자에게 후견인을 붙여줄지, 후견인의 활동을 어떻게 감시할지 등 구체적인 시행 기준과 방식을 정하는 일이 까다롭다. 현재 발달장애인에게 적용되는 공공후견의 종류는 후견 기간이 2, 3년이고 대리할 수 있는 사무도 제한된 ‘특정후견’이다. 하지만 정신질환과 치매 환자의 후견인은 인신 구속(강제 입원)의 필요성을 판단하는 등 후견의 범위가 넓고 기간 제한도 없는 ‘한정후견’이 될 가능성이 높아 자격 심사와 교육을 더 엄격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후견인에 대한 지원금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정용신 서울가정법원 공보판사는 “현재는 후견인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적어 법원이 후보들에게 ‘제발 환자를 맡아 달라’고 읍소하는 상황”이라며 “법원마다 국선변호인처럼 국선후견인을 두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