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자기이익이 최우선? 경제학에 속으셨군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차가운 계산기/필립 로스코 지음·홍기빈 옮김/384쪽·1만7000원·열린책들

20세기 초 미국 베들레헴 철강회사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들의 모습. 이 회사는 프레더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 기법을 받아들여 노동자들의 작업 방식을 일일이 통제했다. 열린책들 제공
20세기 초 미국 베들레헴 철강회사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들의 모습. 이 회사는 프레더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 기법을 받아들여 노동자들의 작업 방식을 일일이 통제했다. 열린책들 제공
누구나 ‘인생의 책’이 있다. 나는 영국 물리학자 J D 버날(1901∼1971)이 쓴 ‘사회과학의 역사’(한울)를 읽고 사회과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버날의 책이 마음에 들었던 건 사회과학의 매력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뼛속까지 자연과학자였던 버날은 사회과학을 수학이나 물리학보다 몇 수 아래로 봤다. 실험이나 검증이 힘들다는 이유 외에도 그가 주목한 건 사회과학이 지배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는 경제학의 숫자놀음을 이런 관점에서 혹독하게 비판했다. “숫자는 중립적 사실이라는 겉모습을 지니기 때문에 말보다 더욱 기만적이다.”

영국 경영학자 필립 로스코가 쓴 이 책을 읽으면서 20년 전 숙독한 버날의 책이 정확히 오버랩됐다. 두 사람은 영국인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전공도, 살아온 시대도 다르지만 경제학을 추종할 때 빠지는 함정을 똑같이 갈파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기계에 의해 창조된 세상 너머의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저자도 경제학에 의해 창조된 허구를 직시하라고 촉구한다.

저자가 보는 허구의 핵심은 주류 경제학의 지상명령이자 기본 전제인 합리적 인간의 ‘자기이익’ 추구다. 자기이익에 기반을 둔 경제학적 의사결정이 사회적 연대와 집단행동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회 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앞서 버날이 비판한 지배층에 봉사와 일맥상통한다. 이를테면 ‘죄수의 딜레마’에서 경제학적 합리성은 최소 리스크로 최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상호 배신’일 수밖에 없다. 각 독방의 죄수가 신의를 지키는 집단행동은 최상의 결과를 낳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선택지에서 배제된다.

특히 가정이 정확하지 않아도 반증할 수 있는 예견만 제시하면 경제이론으로 성립될 수 있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은 위험한 경제 모델이 잉태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누구도 정확히 검증할 수 없다는 상상 속 이론이 마침내 현실을 규정지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경제학자들조차 제대로 판독할 수 없는 금융수학으로 무장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금융 파생상품의 복잡한 수식은 힘없는 서민들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자기이익 원칙을 중심에 둔 각국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도 도마에 올랐다. 예컨대 영국 대처 정부는 노후화된 공공주택 관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서민들에게 소유권을 넘겼다. 자기 소유물에 대한 애착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차익 실현을 위한 부동산 투기를 부작용으로 남기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어류 생태계 보호 차원에서 노르웨이 정부가 추진한 ‘대구 어획 쿼터제(대구를 사유재산으로 보고 어획량 상한을 정하는 것)’는 본래 취지와 달리 어촌을 황폐화했다. 어부들이 할당받은 쿼터를 대형 선주에게 팔아넘기는 바람에 어부들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결국 저자는 경제학에서 강조하는 자기이익 추구 혹은 비용-편익 분석은 세상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편일 뿐, 전부가 돼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차가운 계산기#필립 로스코#인생의 책#자기이익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