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 Topic]천재는 얄미워!… 어느 피해자의 고백

  • 동아닷컴
  • 입력 2016년 8월 4일 10시 45분


코멘트

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기행(14)

미성(美聲)의 테너 성악가이던 한국인 P씨는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오페라에 캐스팅되기가 어려웠다. 분장으로 이를 감추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유럽무대에서는 덩치가 작은 동양인이라는 약점도 작용했다. 노래를 아무리 잘 불러도 주역으로 나서기 곤란했다. 조역 또는 단역으로도 부적절했다. 가창력이 너무 좋아 주역 테너를 망신시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객원 지휘를 맡은 거장(巨匠) 주빈 메타 선생이 조역인 P씨의 노래를 듣고 극찬하며 음악감독에게 “주역 더블 캐스팅으로 연습시키면 좋겠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P씨는 세계적인 마에스트로에게서 이런 평가를 받고 가슴이 부풀었지만 끝내 유럽 무대에서 주역을 맡지는 못했다. 물론 한국 무대에서는 여러 번 주인공으로 섰다.


한국을 떠나 이탈리아에 올 때는 세계 최고의 벨칸토 테너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노래 실력만큼은 자신 있었다. P씨는 유럽의 여러 유수한 콩쿠르를 석권하면서 ‘차세대 파바로티’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한국 신문에는 큼직한 얼굴 사진과 함께 이런 식의 소개 기사가 자주 실렸다.


그러나 노래, 연기력, 외모 등 오페라 주역이 필요로 하는 모든 면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인 어느 테너를 만나고 P씨는 야코가 완전히 죽었다. 이것이 P씨가 무대를 떠난 결정적인 이유이다.


P씨가 이탈리아 무대에서 조역급으로 활동할 무렵인 2007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된 도니제티의 오페라 ‘연대의 딸’을 보러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날 주인공 토니오 역으로 출연한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Juan Diego Flórez)의 맑고 힘찬 고음(高音)을 듣고는 감탄에 몸을 들썩였고 질투에 치를 떨었다. 아홉 번의 하이C 음을 내야 하는 난곡 아리아 ‘친구들이여, 오늘은 기쁜 날(Ah! Mes amis)’을 플로레스는 물 흐르듯 수월하게 불렀다. P씨 자신은 눈알을 부라리며 용을 써야 그 고음을 낼 수 있다.


초절기교의 콜로라투라 창법, 중음에서 고음으로 바뀌는 파사지오(Passaggio)의 매끄러움, 청중을 매료시키는 감정 표현 등 나무랄 곳 없는 완벽한 노래였다. 그 아리아가 끝난 후 청중의 우레와 같은 갈채가 극장을 흔들었다. 박수소리가 한없이 길어졌다. 오죽하면 지휘자가 응급조처로 같은 아리아를 다시 부르게 했을까.

플로레스의 ‘기생 오래비’ 같이 잘 생긴 얼굴도 P씨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하필 나이도 1973년생으로 동갑이었다.


그날 혼자 사는 숙소에 돌아온 P씨는 플로레스의 음반을 틀어 다른 노래를 들어봤다.

“아! 플로레스는 천재인가, 괴물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플로레스는 하이C와 하이D를 넘어 하이E 플랫까지도 무난하게 소화하지 않으냐.

P씨는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등 이른 바 ‘세계 3대 테너’의 합동 공연 비디오를 볼 때면 이들의 관자놀이와 목 울대 부근의 핏대를 유심히 살핀다. 하이C를 토할 때 파바로티의 핏대는 별 변화가 없는데 원래 바리톤 출신인 도밍고와 암 투병에서 일어난 카레라스는 핏대를 솟구치며 용을 쓰는 모습이다.

플로레스는 ‘20세기 최고의 테너’인 파바로티와 엇비슷했다.


P씨는 모차르트를 질시(嫉視)한 살리에리의 심경을 이해할 것 같았다. 우사인 볼트와 동시대(同時代)를 살아가는 스프린터의 심정도 이렇겠지? 타이거 우즈의 전성기에 필드에 나선 프로 골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P씨는 그날 충격을 받은 탓인지 가사를 잊는 버릇이 생겼다. 리허설에서 몇 차례 가사를 깜박하고 어버버 하는 말로 둘러대는 실수를 저질러 본 공연에 출연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결국 플로레스 때문에 노래를 접은 셈이 된다.


무대를 떠난 P씨는 로마에서 한국 식당을 열었고 자그마한 이 식당이 그럭저럭 돌아가자 일찌감치 은퇴한 것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플로레스는 이제 ‘벨칸토 테너의 제왕’이라 불린다.

‘내가 지금까지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면 플로레스에 대한 콤플렉스, 질투심 때문에 인격이 파탄되지 않았겠는가?’


2013년 로시니의 고향 페사로에서 열린 로시니 축제에서 플로레스가 로시니의 마지막 역작이자 노래하기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빌헬름 텔’의 1829년 파리 초연판 무삭제본 공연에 나온다기에 P씨는 일부러 그곳까지 가서 관람했다. 테너 주역 아르놀트 멜히탈 역은 전성기의 파바로티도 스튜디오 녹음만 남겼을 뿐 성대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실연(實演)을 거절했던 ‘공포의 배역’이었다.

과연 ‘천상(天上)의 테너’ 플로레스였다. 윤기 나는 고음과 매끄러운 레가토로 54회의 하이B와 19회의 하이C를 눈부신 레이저 빔처럼 토해냈다.


P씨는 이튿날 오전 페사로 시내에 있는 로시니 생가를 방문했다. 로시니의 육필 악보를 구경하며 관리인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로시니는 10세 때부터 오페라를 작곡한 천재랍니다.”
‘천재’라는 단어가 들리자 P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시니 주변의 얼마나 많은 준재, 수재들이 로시니의 재능 앞에 무릎을 꿇고 좌절감에 빠졌을까.


플로레스는 사생활도 깔끔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도밍고와 함께 유엔 친선대사로 임명된 그는 현재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엘 시스테마’ 운동의 페루 지역 유소년 오케스트라의 대표로 활동하기도 한다.

“이 친구, 언론 인터뷰 때 겸손하기까지 하네!‘

P씨는 어느 신문을 읽고 이렇게 느꼈다. 플로레스가 기자에게 한 말이 귀에 맴돈다.

“제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최선에 아직 이르지 못했습니다. 완벽에 이르기 위해 구도(求道)하는 자세로 스스로를 단련시킵니다. 다른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으며 그들에게서 배우는 걸 좋아하기도 합니다.”

테니스도 잘 치고 가정에도 충실하다 하니 부럽고 샘난다!


P씨는 주방에서 이런 추억에 젖어 숙주나물을 무치고 해물전도 부친다. 유학 초기 한국 식당 주방에서 ‘알바’로 한국요리를 배울 때만 해도 자신이 식당을 경영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산채비빔밥 세 개요!”

종업원 아가씨 소피아의 목소리가 경쾌하다. 오후 9시니 마지막 주문인 셈이다. 홀 쪽을 얼핏 보니 서양인 남녀 부부와 아기, 피부색이 가무잡잡한 인도풍 남자가 앉아 있다. 저 사람들이 한국의 비빔밥 맛을 알고 주문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며 도자기 그릇에 취나물, 고사리, 고비, 도라지, 더덕 등을 담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소피아가 손님들의 신상에 대해 스치듯 말했다.

“두어 달 전부터 저분들은 단골이 되었어요. 한 분은 조상이 코레아 사람이라는군요. 성씨(姓氏)는 코레아….”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손님이다. P씨는 반가운 마음에서 남은 녹두가루를 반죽해서 빈대떡 2개를 부쳐 그 손님들에게 한국식 ‘써비스’로 제공했다.

곧 소피아가 종종걸음으로 주방에 왔다.

“손님들이 쉐프를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하시네요.”

P씨도 무료한 참에 이런 상황을 은근히 기대했다.


“한국음식이 참 맛있군요. 제 DNA가 한국음식을 그리워하나 봅니다. 저는 안토니오 코레아입니다.”
“임진왜란 직후 이탈리아에 온 조선인의 후예이지요?”

P씨는 코레아 씨의 부인과도 인사를 나누고 잠든 아기도 안아보았다.

“몇 달 전에 코레아에 다녀왔는데 조상 나라여서 그런지 내내 마음이 푸근하더군요.”
코레아 씨는 감동을 다시 기억하려는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말했다.


그는 동석(同席)한 40대 신사를 소개했다.

“제 친구인 메흐타 대표입니다. 음악기획가이죠.”

코레아 씨와 메흐타 대표는 모두 음악공연 사업가라 했다. P씨는 음악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노래판을 떠나 식당을 경영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피아가 철딱서니 없이 발설하고 말았다.

“저희 사장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나오셨답니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무대에도 선 실력파 테너이시지요.”

“다 옛날이야기입니다만….”


P씨가 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아기가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지 울음이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아앙! 아앙…”

아기 엄마는 당황해서 아기를 얼러 울음을 멈추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럴수록 아기는 더욱 자지러지게 울었다.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P씨에겐 이명(耳鳴)처럼 들려왔다. 심연(深淵)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문득 그 울음은 P씨 자신의 목에서 울려나오는 듯했다. P씨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아기가 되어 엄마 품에 안겨 있는 듯했다. 엄마의 자장가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그쳤다. P씨가 눈을 떠보니 아기는 새근새근 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

“이 아름다운 노래… 한국의 자장가입니까?”

P씨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부른 모양이었다. 메흐타 대표는 물기 어린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예. 제가 태어나 처음 들은 노래….”

“선계(仙界)에서나 들을 수 있는 노래입니다. 무대를 떠나셨다니 무척 안타깝군요. 언젠가 꼭 컴백하십시오.”


메흐타 대표는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P씨에게 건네주었다. 며칠 후 로마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콜로세움 복원(復元) 기념음악회’ 입장권 몇 장이 들어있었다.

“그날 주빈 메흐타 지휘로 라 스칼라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공연합니다. 와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주빈 메타 선생님이 오신다구요? 아… 저를 무척 아껴주신 분인데….”

“아, 그래요? 저희 집안 아저씨입니다. 서방에서는 ‘메타’라 하지만 고향 인도에서는 메흐타(Mehta)라고 부르지요. 메흐타 가문은 음악 명문가입니다. 주빈 메흐타 아저씨의 아버지인 메리 메흐타 선생도 뭄바이 교향악단 지휘자로 활약하셨답니다.”


2016년 7월 1일 저녁 콜로세움에 간 P씨는 공연 전에 악단 연습장으로 들어갔다. 단원들은 리허설에 열중이었다. 잠시의 휴식 시간에 몇몇 낯익은 단원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감히 주빈 메타 선생에게는 다가가지 못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니 팔순 연세인데도 여전히 정정했다.


오후 8시 30분, 2000년간의 묵은 때를 벗고 깨끗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콜로세움 내부에는 휘황한 빨강, 초록의 화려한 조명이 비치는 가운데 공연이 시작됐다. 테너 파비오 사르토리, 소프라노 페데리카 롬바르디 등 이탈리아의 젊은 성악가들이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를 들으니 P씨는 자신이 무대에 선 듯한 착각이 든다.


P씨 옆에 나란히 앉아 공연을 관람한 소피아와 그녀의 남자친구 무기고(Mughigo)는 앙코르 노래인 ‘라 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우레와 같은 갈채 속에 공연이 끝났다. P씨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상념에 잠겼다.

며칠 후 P씨의 식당에 한국에서 온 ‘먹방’ 방송팀이 들이닥쳤다. 여성 연예인 2명과 스태프 4명이 몰려온 것이다. Y감독이라는 책임 PD가 P씨에게 말문을 열었다.

“세계 각국의 한국 식당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음식 한류를 조성하기 위한 프로젝트이지요. 로마에서 섭외한 식당에서 촬영을 하긴 했는데 너무 밋밋했답니다. 밀라노로 떠나려는데 마침 이 식당이 눈에 띄어 무작정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촬영하면 어떨까요?”

“저희 집은 더 밋밋할 텐데요. 식당 크기도 콧구멍만 하고….”
“들어오자마자 인상적인 것은 종업원 아가씨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Y감독은 소피아를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이 아가씨를 출연시키고 싶어서요.”

소피아는 이 대화를 듣고 P씨에게 사정했다.

“사장님, 저 한국 방송에 나가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
P씨는 난처했다. 소피아의 청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소개될까봐 두려웠다. 잠시 고민하다 Y감독에게 제안했다.

“제 얼굴을 촬영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지켜주시면 좋습니다.”

“이탈리아 아가씨가 한국음식에 반해서 한국어도 열심히 배우게 됐다…는 콘셉트로 진행하겠습니다.”

“소피아가 꼭 그래서 한국어를 배운 건 아닙니다만….”

“요즘 스토리텔링이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스토리를 좀 꾸미려 하니 이해해주세요.”

“스토리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소피아의 남자친구를 불러 함께 촬영하시면 더 좋겠는데요. 그 친구는 경상도 사투리가 특기랍니다.”

“예? 좋습니다! 소피아 님, 지금 남친분 여기로 얼른 오라고 연락하시겠어요?”


그래서 소피아와 무기고가 한국 먹방에 출연했다. 처음 촬영할 때 소피아는 카메라 앞에 서자 몸이 굳고 한국어 발음도 어눌했다. 여러 차례 NG를 냈다. 산채비빔밥을 먹는 장면이었다.

“한국 음식 가운데… 저는 산채비빔밥을…가장 좋아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쌀밥을 많이 먹지만… 이렇게 채소가 듬뿍 든…비빔밥은 없습니다.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 맛이 일품이네요.”


P씨가 듣기엔 소피아의 평소 한국어 실력보다 훨씬 못했다. 그러고 보니 소피아는 요즘 북한말 연습에 한창이었다. 차라리 북한말을 쓰면 어떨까.

“감독님, 소피아가 북한 사투리로 말하도록 하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요?”

“예? 한 번 들어볼까요?”

그래서 소피아는 함경도, 평안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말했다.

“내레 조선 음식 가운데서 산채비빔밥을 제일 좋아합네다. 이태리 사람들도 쌀밥을 많이 먹지만 이렇게 남새(채소)를 듬뿍 넣은 비빔밥은 없습네다.”

소피아는 고추장을 한 숟가락 푹 떠서 부지런히 비벼 입을 크게 벌려 먹었다. NG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좋습니다!”

Y감독은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OK 표시를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무기고 청년은 해물탕을 먹으며 경상도 사투리로 말했다.

“국물 맛이 지기줍니더(죽여줍니다)! 게기(고기)살, 뻬간지(뼈), 합자(홍합), 새비(새우), 이런 해산물하고 무시(무), 정구지(부추), 마널(마늘), 이런 채소가 어우러져서 일품입니더예!”

무기고의 경상도 사투리가 워낙 원단 발음이어서 촬영기사가 킥킥 웃는다.


무기고와 소피아의 이 장면이 한국에서 방영되자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다. 인터넷 조회수가 급증하고 그 케이블 방송에서는 여러 번 재방영했다. 광고회사들도 무기고와 소피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달 후 Y감독이 다시 로마에 와서 무기고와 소피아를 만났다.

“두 분, 한국에 오셔서 방송활동을 하시지요. 두 분이 출연하는 고정 프로그램을 만들까 합니다.”

무기고와 소피아는 눈이 동그래져 P씨를 바라보았다. 프로그램 이름도 정해 놓았단다.

“<무소의 뿔, 종횡무진 가다!>입니다.”

무소의 뿔? 무기고와 소피아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Y감독은 보충 설명을 했다.

“두 분의 이름 앞 발음을 따서 지었지요. 무, 소…. 무기고 님은 경상도 사투리로, 소피아 님은 이북 사투리로 말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무기고, 소피아는 P씨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P씨는 로마 식당을 처분하고 삶터를 한국으로 옮기기로 작정했다. 당분간 ‘무소 커플’이 한국에 잘 정착하도록 P씨가 매니저 비슷한 역할을 맡기로 했다.


귀국하는 항공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어느 한국인 청년이 헤드폰으로 음악을 감상하며 노래를 나지막하게 따라 불렀다. 멜로디가 아름다워 P씨는 그 청년에게 조심스레 들어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저는 한국 가곡을 즐겨 듣습니다. 새로 작곡된 노래인데 줄줄이 명곡이네요.”

P씨는 한국 예술가곡을 들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난도 테크닉을 요하는 오페라 아리아와는 달랐다. 그 가운데 ‘영원한 친구’라는 노래가 유난히 오랜 여운(餘韻)을 남겼다.


<무소의 뿔, 종횡무진 가다!>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부상했다. 무기고와 소피아는 전국을 탐방하며 한국 풍습을 체험하고 현지 주민들과 만났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TV 화면에 소개되는 것이다.


안동에 가서 탈춤놀이를 체험할 때다. 무기고는 양반탈을, 소피아는 소실 역할인 부네탈을 썼다. 담당 PD인 Y감독은 촬영장면을 멀뚱히 구경하던 P씨의 얼굴에도 선비탈을 씌웠다.

“이거 뭡니까?”

“얼굴을 탈로 가리니 누구인지 모를 것 아닙니까. 재미 삼아 탈 쓰고 놀아보세요. 저도 쓸 겁니다.”

Y감독은 머슴 초랭이의 탈을 썼다. 그는 대본을 주며 꼭 그대로 읽지 말고 기분에 따라 말해도 괜찮다고 한다. P씨는 엉겁결에 탈을 쓰고 무대에 나섰다.

탈춤놀이 넷째 마당. 둥, 둥, 둥…. 북이 울리면서 불이 꺼졌다.

부네가 엉덩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무대에 나타나자 양반과 선비가 모두 눈독을 들인다. 이들은 부네를 서로 차지하려고 학식 자랑을 한다.

선비= 나는 사서삼경을 다 읽었소.

양반= 사서삼경이라고? 나는 팔서육경을 다 읽었네.

선비= 도대체 팔서육경이 어디 있소? 육경이 뭐요?

초랭이= 소생도 아는 육경을 선비님이 몰라요? 팔만대장경, 땡초중의 바래경, 봉사 안경, 약방에서 파는 길경, 처녀 월경, 머슴 새경….

부네= 아이고, 웬 구닥다리 육경인가! 초밥 맛 좋은 동경(東京), 오리고기 끝내주는 북경(北京), 받고 싶은 존경(尊敬), 멀리 보아야 멋있는 원경(遠景),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 태진아 노래 옥경!

양반= 아랫것들도 다 아는 육경을 선비가 모르다니 말이 되는가?

선비= 억지를 부리시니 답답하오.

양반= 가슴이 답답하면 노래를 불러 푸시게!


선비(P씨)는 노래를 부르게 됐다. 안동 탈을 쓰고 오페라 아리아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를 수야 없지 않은가. 얼핏 귀국 비행기 안에서 들었던 한성훈 곡, 김남수 작시 ‘영원한 친구’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진실하게 도전했던 꿈같은 청춘

아련한 추억 속에 찾아온 그리움

앞만 보고 살아온 지나간 세월

크고 작은 웃음 속에 남겨진 아쉬움…


안동 탈춤 편이 방영되자 ‘무소 커플’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이와 함께 선비탈을 쓴 남자의 정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전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P씨는 Y감독에게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Y감독이 입을 굳게 다무니 신비주의 효과에 따라 관심도는 증폭됐다.

‘영혼을 울리는 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인터넷에는 이런 제목과 함께 팝페라 가수 H, L, A 등이 거명됐다.


단양 팔경 편을 촬영하는 현장에서 사달이 났다. 옥순봉 앞에서 무기고와 소피아가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 찾아왔다고 설명하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짙은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Y감독을 찾더니 안동 탈춤 편에서 ‘영원한 친구’를 부른 분이 누구인지 물었다.


“당사자가 신원 노출을 거부하십니다.”

“살짝 귀띔만 해주세요. 제 인생이 걸린 중대사랍니다.”

“그런 일이라면 더더욱 공개하기 곤란하군요.”

“목소리, 가창법으로 보아 제가 아는 분인 듯해서요. 그분 이름을 인터넷에 공개할까요?”

“추측성 공개는 명예훼손, 프라이버시 침해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분을 찾으러 로마에까지 갔단 말이에욧!”


Y감독과 그녀의 대화를 먼발치에서 엿듣던 P씨는 ‘로마’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저 정체불명의 여성이 누구인가?’

P씨는 호기심에서 슬며시 다가갔다. 5m쯤 거리로 다가갔을 때였다. 그녀의 시선이 P씨의 얼굴에 쏠리는 듯했다. 이젠 그녀가 P씨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 토스카 함께 부르던 거 기억하시지요?”


단양에 있는 부초미술관의 O대표는 P씨의 손을 잡고 반갑다며 흔들었다. P씨는 이탈리아 유학을 떠나기 전에 허름한 야간 전수학교에서 음악 강사로 잠시 일하던 청춘시절이 떠올랐다. 오페라를 몇 번 듣고 긴 가사를 통째로 외우던 천재 소녀….

“아, 오래 전 일이네요. 반갑습니다.”

“선생님, 사제지간(師弟之間)인데 말씀 낮추세요.”

“…….”

“제가 로마 식당에서 얼핏 뵈었는데요.”

“…….”


O대표와 P씨는 촬영장을 벗어나 호젓한 계곡물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성악계의 신성(新星)이라고 한국 신문에 자주 보도됐는데 언젠가부터 활동소식이 잠잠하더군요. 사연이 너무도 궁금해서 선생님을 만나 뵈러 로마에까지 갔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일이 있어 노래를 그만 두었어요.”

“그 일을 제게 밝힐 수 있으신지요?”

“…….”

“천천히 말씀하셔도 돼요. 저는 선생님한테 이탈리아 노래를 배운 덕분에 인생 행로(行路)가 바뀌었답니다.”


O대표는 핸드백에서 캔커피 2개를 꺼냈다.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O대표의 과거, 현재의 여정(旅程)을 들은 P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천재는 역시 다르군.”

그 말을 들은 O대표는 자신이 ‘천재’라 불린다는 점이 민망스러워 잠시 침묵을 지켰다.

P씨의 뇌리엔 천재 테너 플로레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플로레스와 O대표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묘한 낌새가 느껴졌다.

‘이 여성은 내 미래 운명을 뒤흔들 팜므 파탈(femme fatale)?’


고승철 소설가 songcheer@naver.com

#매거진d#magazine d#고승철#시간기행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