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재영]아전인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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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경제부 기자
김재영 경제부 기자
2011년 초 일본 역세권 개발을 취재하면서 고베(神戶) 시 외곽의 신칸센 ‘신고베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기존 도심과 한참 떨어진 산 중턱에 세워진 역사는 적막 그 자체였다. 주변에 지어진 오피스텔엔 ‘추가 할인 분양’을 알리는 큼지막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당시 기자를 안내했던 일본인 교수는 “수요보다는 정치논리에 따라 철도노선을 결정한 사례가 많다”고 귀띔했다.

1988년 개통된 히로시마(廣島) 현 오노미치(尾道) 시의 ‘신오노미치역’도 마찬가지다. 당시 지역 주민들은 조선업이 불황에 빠지자 지역 경제를 되살리려고 신칸센역 유치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접근성이 나쁜 곳에 무리하게 역을 지으면서 승객이 찾지 않는 역으로 전락했다.

도쿄와 신오사카를 잇는 도카이도(東海道) 신칸센의 기후하시마(岐阜羽島)역도 대표적인 정치적 산물이다. 기후 현 출신 유력 정치인 오노 반보쿠(大野伴睦)가 별다른 기반시설이 없는 자신의 고향에 신칸센을 유치하려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주민들은 역 앞에 오노 부부의 동상까지 세웠지만, 1964년 개통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용률은 미미하다. 이 같은 행태를 놓고 ‘제 논에 물 대기’라는 뜻의 아전인수(我田引水)에 빗대 ‘아전인철(我田引鐵)’이라는 조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2004년 고속철도(KTX) 개통 이후 노선 배분과 정차역 추가를 놓고 지역 갈등이 계속됐다. 이 때문에 어정쩡한 타협을 본 경우도 많다. 경부선 오송역은 충남과 충북, 김천구미역은 경북 김천시와 구미시, 호남선 공주역은 충남 공주시, 부여군, 논산시, 계룡시의 눈치를 보느라 기존 도심과 수십 km 떨어진 허허벌판에 자리 잡았다. 신도시급의 부도심으로 육성하겠다던 역세권 개발도 아직 지지부진하다.

올해 초엔 KTX 호남선 노선 배분 문제를 놓고 호남·충북과 대전·충남이 갈려 지역 간 대립이 벌어졌다. 호남은 ‘저속철’이 돼선 안 된다며 서대전역 경유 불가를 외쳤고 대전·충남은 지역 수요를 고려해 서대전역을 경유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정부가 호남선은 서대전역을 경유하지 않되, 대전·충남 수요를 고려해 별도의 KTX를 편성하기로 하면서 논쟁이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다. 호남과 대전지역 의원들은 서대전역을 통과하는 별도 KTX를 광주역까지 연장 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광주송정에서 목포를 잇는 호남선 KTX 2단계 사업도 나주·무안공항 경유 문제가 남아 있다. 내년 서울 수서발 KTX 개통 때 호남과 대전·충청권의 노선 뺏기 2라운드 경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곳곳에서 지역논리가 득세한다면 KTX가 ‘누더기철(鐵)’로 전락할 수 있다.

고속철도와 같은 주요 국가 인프라가 더이상 지역 정치논리에 휘말려선 안 된다. 한 번 노선을 잘못 결정하면 그로 인한 경제적 손해와 불편을 두고두고 국민들이 떠안아야 한다. ‘수요가 있는 곳에 노선을 배정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KTX가 ‘정치철(鐵)’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재영 경제부 기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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