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정훈] 불끈 쥔 대통령의 주먹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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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사회부장
김정훈 사회부장
2003년 6월 2일이었다. 여러 기자들이 손을 들었는데 내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일찍 지명받기를 바라진 않았는데 하는 생각과 그래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 때의 일이다. 이날 아침까지도 노 전 대통령의 후원회장을 지낸 인사의 부동산 관련 의혹이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그날 회견은 사전에 질문자를 미리 정해두지 않고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손을 들면 홍보수석비서관이 지명해 질문을 받는 ‘자유질문’ 식으로 진행됐다. 필자는 그날 회견에서 두 번째로 지명을 받았다. 친인척과 측근 관련 의혹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이 국민의 인식과 차이가 있는 것 같으니 보다 분명하게 입장을 밝혀 달라는 게 질문의 요지였다.

내심으론 회견 후반부에 내가 지명되길 바랐다. 갓 취임 100일을 맞는 새 대통령이 회견 초반부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누군가 물어야 할 질문이니 회견 초반이지만 바로 물어보기로 마음먹고 질문을 시작하는데 저 멀리 연단에 서 있는 노 전 대통령이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게 보였다. 질문을 마치자마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노 전 대통령은 “참으로 큰 인식 차이를 느낀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불끈 쥔 주먹을 연단 위에 올려놓은 노 전 대통령은 “신빙성도 없는 얘기를 신문에 새까맣게 발라가지고 마치 대통령 측근에게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항변했다. 답변이 이어지면서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제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보면서 12년 전 일선 취재기자 시절의 일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형 노건평 씨의 거제 땅 관련 의혹, 후원회장이던 이모 씨의 용인 땅 관련 의혹 등으로 연일 언론의 공세에 시달렸다. 박 대통령 역시 비선 실세 의혹을 사온 정윤회 씨의 국정 개입 의혹부터 동생 박지만 EG 회장이 등장하는 권력 암투설에 이르기까지 한 달 넘게 시달렸으니 사정은 너무나 비슷하다. 게다가 회견 이틀 전엔 핵심 참모인 민정수석비서관의 항명 파동까지 벌어지면서 박 대통령으로선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다혈질인 노 전 대통령이 주먹을 불끈 쥔 것에 비해 그나마 박 대통령은 회견 후반엔 여유를 찾은 듯 농담도 하고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모처럼 선거가 없는 해이니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자’고 호소하려 했던 이번 신년 기자회견은 실패작으로 끝나고 말았다.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견 다음 날인 어제 아침 조간신문들에는 일제히 김기춘 비서실장과 ‘문고리 3인방’을 왜 자르지 않느냐고, 대통령은 민심을 제대로 알긴 아느냐고 지적하는 냉혹한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인적 쇄신은 이들 참모가 사심(私心)을 갖고 있거나, 뭔가 비리를 저질러서 하자는 게 아니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는 국민에게 신뢰를 주는 안정적인 참모진이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을 곪을 대로 곪을 때까지 방치하다 검찰이 한 달 넘게 수사를 벌이는 문건 파동이 벌어지게 한 책임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검찰 수사로 그 과정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국민의 눈에는 이미 대통령을 보좌할 자격이 없는 인물들로 낙인이 찍혔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는 참모들이겠지만, 이제는 두 주먹 불끈 쥐고 딱 잘라 결정을 내릴 때다.

김정훈 사회부장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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