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만원에 中 농가 팔려가 남편폭력-북송공포 ‘생지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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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A 개국 3주년 기획]국경 너머에도 천국은 없었다
<上> 인신매매 신음하는 탈북여성들

탈북 여대생 박연미 씨가 10월 아일랜드에서 열린 ‘2014 세계 젊은 지도자 회의’에 참석해 탈북 여성의 인권유린 실태를 고발한 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인신매매 피해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가 6월 발표한 ‘인신매매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1만 명으로 추산되는 북한 여성과 소녀들이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통해 강제결혼이나 성매매,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

채널A 특별취재팀은 10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중국 지린(吉林) 성과 라오스에서 인신매매 피해 여성 5명을 만나 이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취재했다. 리포트는 ‘채널A 종합뉴스’를 통해 3일까지 3회에 걸쳐 방송된다.

○ 인신매매 후 강제결혼… 돌아온 건 폭력뿐


탈북 여성 장미옥(가명·왼쪽), 김옥순(가명) 씨가 지난달 13일 중국 지린 성 옌지의 안가(安家)에서 채널A 취재진을 만났다. 두 사람은 1998년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지만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 남성과 결혼했다. 옌지=박연수 채널A 영상취재팀 기자
탈북 여성 장미옥(가명·왼쪽), 김옥순(가명) 씨가 지난달 13일 중국 지린 성 옌지의 안가(安家)에서 채널A 취재진을 만났다. 두 사람은 1998년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지만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 남성과 결혼했다. 옌지=박연수 채널A 영상취재팀 기자
지린 성 옌지(延吉) 시 버스터미널에서 김옥순(가명·51), 장미옥(가명·48) 씨를 만난 건 지난달 13일 오후 2시쯤이었다.

이들은 취재진을 만난 뒤에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혹시 공안이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택시를 타고 30분쯤 달려 안가에 들어간 후에도 두 사람은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듯 한참이나 말문을 열지 못했다. 물잔을 집어 들던 그들의 거친 손이 그들이 겪었던 참혹한 고통을 말해주는 듯했다.

김 씨와 장 씨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온 건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하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인 1998년이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김 씨에겐 국경을 넘는 것만이 북한에 남은 노모와 자식을 부양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선족 탈북 브로커는 김 씨에게 “중국에 가서 식당일을 하면 하루에 80위안(약 1만4000원)을 벌 수 있다”고 꼬드겼다. 브로커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자 또 다른 중국인 브로커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말도 모르는 김 씨는 강제 북송에 대한 두려움에 그들을 무조건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며칠 뒤 도착한 곳은 식당이 아닌 시골 농가였다. 중국인 남편은 그를 5000위안(약 90만 원)에 사왔다고 했다.

매일같이 눈물을 쏟아내자 중국인 남편은 “도로 북한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했다. 결혼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에서 떨어져 하반신 마비와 정신지체 장애인이 된 남편은 매일같이 김 씨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김 씨는 “남편이 머리채를 잡으면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몸이 불편한 남편의 대소변까지 받아야 했다.

한국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아들이 눈에 밟혀 떠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엄마, 나 두고 가지 마’라고 말하는 걸 들을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픕네다.”

○ 강제북송 두려움에 매일 떨어

인신매매로 중국 농촌으로 시집을 온 탈북 여성들은 강제북송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장 씨도 김 씨와 마찬가지로 탈북 브로커에 속아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장 씨는 “애가 두 살 되던 해에 도망치려고 했는데 살 방도가 없어 그냥 눌러 살게 됐다”고 말했다. 장 씨는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했다. 장 씨는 “지금도 마을에 낯선 차라도 들어오면 장롱 안에 숨는다”고 말했다.

지린 성 시골 마을에서 만난 박순희(가명·41) 씨는 2004년 탈북한 뒤 팔려 왔다. 조선족인 남편은 도박 중독자였다. 남편의 도박 빚으로 늘 가정형편은 어려웠다. 박 씨는 “남편이 1년 전 돈을 벌어오겠다며 한국으로 갔지만 지금까지 보낸 돈은 한 푼도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박 씨는 큰아들을 낳은 지 얼마 안 돼 공안에 붙잡혔다가 1500위안(약 27만 원)을 주고 풀려났다. 박 씨는 지금도 공안이라는 말만 들으면 몸서리를 친다.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들어 집에 있던 돈을 몽땅 가져간 적이 있었단 말입네다. 그런데 그래서 내가 부들부들 떨면서 공안에다 전화를 해 공안 차가 쌩 하고 왔는데 아차 싶더라고요. 공안이 또 날 잡아가면 어쩝네까. 결국 이웃집 언니에게 사정을 말하고 산으로 숨었지요.”

한국에 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박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기서 죽을 생각을 백 번도 더 했지만 자식 때문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습네다. 큰애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한다고 선생님 칭찬이 자자해요. 제 유일한 희망이란 말입네다.”

옌지=김민찬 mckim@donga.com·정동연 채널A 기자
#탈북#인신매매#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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