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지루해, 지루해… 그래서 자유롭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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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고쿠분 고이치로 지음·최재혁 옮김/376쪽·1만9000원·한권의책
풍요로운 사회서 일어나는 지루함…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
철학자의 생각통해 극복방안 제시

영화 ‘파이트클럽’의 주인공인 브래드 피트(왼쪽)와 에드워드 노턴. 한가하진 않지만 지루한 주인공(에드워드 노턴)은 고급 브랜드 상품을 소비하며 지루함을 달래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그는 타일러(브래드 피트)를 만나 파이트클럽을 결성해 지루함과 무한 소비를 극복하려고 한다. 동아일보DB
영화 ‘파이트클럽’의 주인공인 브래드 피트(왼쪽)와 에드워드 노턴. 한가하진 않지만 지루한 주인공(에드워드 노턴)은 고급 브랜드 상품을 소비하며 지루함을 달래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그는 타일러(브래드 피트)를 만나 파이트클럽을 결성해 지루함과 무한 소비를 극복하려고 한다. 동아일보DB
빌 머리와 앤디 맥다월이 주연한 ‘사랑의 블랙홀’(1993년)이란 영화가 있다. TV리포터인 남자 주인공과 PD인 여자 주인공이 한 마을로 취재를 나갔다가 폭설 때문에 마을에 갇힌다. 그런데 남자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매일 오전 6시에 어김없이 눈이 떠지는데 똑같은 날이 반복된다. 심지어 자살도 해보지만 반복은 그치지 않는다. 결국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내일’을 맞게 된다는 로맨틱 코미디인데, 지루함이 얼마나 인간을 좌절시키는지도 보여준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많은 궁금증이 들었다. 지루함만 가지고 과연 한 권의 철학책을 만들 수 있을까. 지루함이란 것 자체가 철학자들의 고민 속에 들어있기나 한 걸까.

1974년생인 저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일본에서 주목받는 신진 철학자로 이 책으로 2011년 ‘기노쿠니야 올해의 인문대상’을 수상했다. 저자는 파스칼 러셀 니체 헤겔 마르크스 하이데거 아렌트 들뢰즈 등 다양한 철학자들이 언급한 지루함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지루하다는 것의 정의와 본질을 풀어낸다. 특히 하이데거의 경우 지루함을 본격적으로 설명한 철학자로 상당 분량을 할애해 설명한다.

저자를 가상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저자의 주장을 전한다.

―지루함은 인간의 본성인가.

“호모사피엔스인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유목 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1만 년 전 농경이 시작돼 ‘정착’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 유목생활 때 발전시켰던 ‘새로운 환경에 대한 탐색 능력’이 필요 없어졌다.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지루함이 생긴 것이다. 인류에게 지루함은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진 사건이지만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됐다.”

―그러나 농민 같은 하층 계급은 지루함을 느낄 한가함이 없지 않았나.

“자본주의 이전엔 한가로움을 독점한 유한계급이 주로 지루함의 주체가 됐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누구에게나 ‘여가’라는 권리가 주어졌다.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함이 화제가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다.”

―현대 소비사회에서 일어나는 지루함의 양상은 무엇인가.

“소비다. 현대의 소비는 ‘내가 무엇을 원해서’가 아니라 ‘자본이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자극하면서’ 이뤄진다. 현대의 소비는 해당 물건을 즐기지 못하고 그저 그걸 사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따라서 끝이 없다.”

―대체 지루함이란 무엇인가.

“철학적 용어로 풀이하자면 ‘공허하게 방치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좌절된 상황이다. 여기서 사건이란 어제와 오늘, 과거와 현재를 구별해주는 것이다. 사건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지루함의 반대는 무엇인가.

“흔히 쾌락이라고 잘못 이해하기 쉬운데 사실 ‘흥분’이다. 낚시꾼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고 치자. 낚시를 하기 위해 드는 비용만큼의 물고기를 사주겠다고. 낚시꾼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낚시꾼은 고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고기 잡는 걸 원한다. 그에게 고기는 욕망의 대상이긴 하지만 욕망의 원인은 아니다.”

―왜 지루함을 철학적 고찰 대상으로 삼았나.

“그건 ‘인간다운 삶’이 과연 무엇일까를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됐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몰라 괴로워한다. 지루함을 때때로 느껴야 인간으로서의 즐거움을 알 수 있다. 즐거움을 알면 즐거움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즐거움은 훈련을 통해 더 확장된다. ‘지루함을 어떻게 맞이하며 살아갈 것인가’는 자신에 대한 질문이지만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전쟁 기아 빈곤 등으로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타인에게 과연 어떻게 지루함을 선사하는 세계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파이트클럽#사랑의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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