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두영]여의도 딴짓거리 잔혹사

  • 동아일보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선도부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이 취하는 권력은 교사의 폭력에 기인한다. 벗어날 수 없는 폭력에 길들여질 때 향락이라는 고통의 쾌락을 얻는다. 폭력은 증오와 분노, 폭력에 대한 폭력까지도 먹고 자라는 쾌락의 산물이다.’

1970년대 말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그린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대한 박시성 고신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평론이다.

첫 문장에서 단어만 몇 개 바꾸어 보자. ‘의정(議政)이라는 이름 아래 지방의원들이 취하는 권력은 국회의원의 폭력에 기인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잇달아 터져 나오는 지방자치단체 광역의원과 기초의원의 무능과 비리와 폭력은 국회의원의 그것과 놀랍도록 닮은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게 된다.

바른사회시민회의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 전국 17개 광역시도를 포함한 지방의회 의원들이 발의한 조례는 한 명당 1건꼴이다. 발의 자체가 적은 것도 문제지만 기껏 제정한 조례도 ‘불량품’이 많다.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지방의회에서 재의결한 조례 18건 가운데 법령 위반으로 대법원에 제소된 것이 2013년에만도 50%(9건)다. 이 밖에도 지자체 간 중복 조례, 상위법 중복 조례, 특정 단체용 선심성 조례, 필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은 조례도 많다.

본업인 의회의 일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서 주요 이해관계자의 경조사는 직접 챙긴다. 새마을운동협의회,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로타리클럽, 방범위원회, 청소년선도위원회, 조기축구회 같은 지역 조직의 감투를 쓰고, 잡다한 지역단체 행사에 부지런히 얼굴을 내미는 게 주요 일과다. 하는 일 없이 의정비는 꼬박꼬박 받으면서 다음 선거에 대비하는 일정만 챙긴다. 의정비 인상이나 해외 시찰을 빌미로 하는 외유에서는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다.

의회에 가서는 걸핏하면 정책 심의를 거부하고 예산안 처리를 지연시킨다. 이어지는 욕설, 몸싸움, 휴회, 점거, 농성, 폭력…. 어디서 배운 걸까. 전형적인 패거리 정치다. 8일 부산 해운대구의회에서는 한 의원이 휘발유를 채운 페트병을 들고 단상을 점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아! 지긋지긋한 데자뷔(이미 본 듯한 느낌)여! 국회의사당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는데 지방의회에서 화염병쯤이야. 급기야는 서울시의 한 의원이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는 후원자를 죽여 달라고 교사한 혐의로 구속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국회의원들이 여의도에서 벌이는 ‘딴짓거리’의 잔혹사가 풀뿌리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확산되고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풀뿌리 비리로 오염시키고 있다. ‘선도부’ 역할을 해온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비서관이 지방의회에 가서 여의도에서 배운 ‘딴짓거리 잔혹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감님’(국회의원)의 가호(加護)를 업고 지역구에서 완장 하나 차고 드잡이 짓을 하는 ‘선도부원’들이다.

지긋지긋한 데자뷔는 일요일 밤마다 해학으로 이어진다. KBS 개그콘서트에서 깐죽거리는 조폭 패거리들이 서민에게서 자릿세를 뜯으려다 망신당하는 상황을 풍자한 코너 ‘깐죽거리 잔혹사’다. 걸핏하면 국가나 국민을 들먹이는 ‘영감님’처럼, 패거리도 온갖 ‘거룩한’ 사설(邪說)을 둘러댄다.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조상의 얼을 모아…’. 그러다가 무림 고수에게 반격을 받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공격하는 부위는 명치, 울대, 인중, 낭심 같은 급소다. ‘빡!’

결국은 (‘광화문에서’)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냐’라고 둘러대는 그들의 능청에 박수를 보낸다. “짝! 짝! 짝!”

‘끝!’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huhh20@donga.com
#선도부#말죽거리잔혹사#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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