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섭 전문기자의 바둑人]<11> 中 구리 9단 “이세돌은 하늘이 보내준 내인생의 보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30일 0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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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9단은 “말보다 행동, 호언장담보다 최선의 노력을 통해 하나하나 이뤄가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사진은 신안에서 열린 10번기 4국을 끝내고 복기하는 모습. 한국기원 제공
구리 9단은 “말보다 행동, 호언장담보다 최선의 노력을 통해 하나하나 이뤄가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사진은 신안에서 열린 10번기 4국을 끝내고 복기하는 모습. 한국기원 제공

중국 바둑이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에게 밀리고 다시 이세돌 9단이 천하를 호령할 무렵, 구리(古力) 9단은 중국 바둑의 자존심이었다. 1983년생 동갑 라이벌인 이세돌과 바둑 천하를 놓고 겨뤘다. 지난해 중국의 '90후(1990년대 출생자)'들이 세계대회 개인전 타이틀을 휩쓸었지만 구리에 대한 중국 팬들의 사랑은 여전하다. 27일 전남 신안군에서 열린 10번기 4국을 앞두고 그를 서면 인터뷰했다.

구리는 이세돌에 대해 "이세돌 선생(이하 선생 생략)은 출발선에서 항상 한발 앞선 선수로 나를 쉬지 않고 앞으로 가게 한다"며 "하늘이 내게 보내준 바둑 인생의 보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바둑 인생의 가장 큰 스승으로 아버지를 꼽았고, "바둑은 내 생명과 뗄 수 없는 일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세돌에 대해 '내 인생의 선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의미는….

"그를 알게 된 이후 줄곧 쫓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항상 출발선에서 한발은 앞선 선수여서 나를 쉬지 않고 앞으로 가게 만드는 동력이었다. 그와의 대결을 통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고, 나를 더 연마할 수 있었다. 바둑 세계에서 나이가 비슷한 상대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런 면에서 이세돌은 확실히 하늘이 내게 준 바둑 인생의 보물이다.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만 나는 그와 60세까지 바둑을 두기 위해 줄곧 노력할 것이다."

―2012년 12월 말 상하이(上海)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이세돌에게 지고도 기자회견장에 나와 축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둑에서 지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세계대회 우승을 결정짓는 시합은 더 그렇다. 다만 바둑 세계에는 승부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합을 통해 승부 이외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이세돌은 바둑판에서는 경쟁 상대지만, 바둑판 밖에서는 친구다. 당시 이세돌이 더 좋은 기회를 잡았다. 그래서 시합 뒤 나는 충심으로 (이세돌의 승리를) 기쁘게 생각했다."

이세돌과 구리는 승부를 떠나 대국 뒤 종종 술을 같이하는 사이다. 맥주를 좋아하는 구리나 주종 불문의 이세돌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주량이라고 한다.

―둘의 기풍을 설명한다면….

"둘 다 전투를 통해 승리를 얻는 기사에 속한다. 내가 전체 대국을 중시한다면, 이세돌은 세세한 부분을 잘 파악하는 강점이 있다."

구리는 '90후'의 강점에 대해 세 가지를 꼽았다. 모두 인터넷의 활용과 관련이 있다.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빠르게 많은 양의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인터넷 대국이 상당한 강도의 훈련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각국의 일류 기사와 기예를 연마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90후와 싸운다면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에 "자신감은 최고 고수가 되는 필수 조건"이라며 "어떤 때 어떤 상대와 바둑판 앞에 앉더라도 자신 있다"고 말했다.

―요즘 한국과 중국에서 바둑을 잘 두는 기사를 꼽는다면. 18세 세계 챔프인 판팅위(范廷鈺)와 미위팅(米昱廷)도 평가해 달라.

"한국의 박정환 9단. 중국은 작년부터 지금까지 7명의 90후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다. 90후들이 지금 기단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게 차지하고 있다. 판팅위와 미위팅은 앞으로 더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

구리 9단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리듬체조 단체 은메달리스트인 뤼위안양(呂遠洋)과 지난해 1월 1일 결혼했다. 이세돌은 새해 첫날 열린 결혼식장을 찾아 축하했다. 구리의 아내는 두 사람의 고향인 충칭(重慶) 시 사핑바의 한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는 "아내와 초등학교 때는 알지 못했다. 2009년 제2회 사핑바 운동회를 통해 알게 됐고 서로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구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지 누가 일부러 프러포즈를 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또 그는 결혼 후 바둑에 더 많은 열정을 쏟을 수 있어 바둑 팬들에게 좋은 대국을 보여 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8월 말 딸 구칭(古晴)을 얻었다. 그는 "때가 되면 딸에게 바둑을 가르칠 것"이라며 "바둑을 잘 둘지는 그가 어느 정도 흥미를 가질지 봐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2008년 후지쓰(富士通)배 결승전에서 이창호 9단에게 이겨 우승을 차지한 뒤 아버지 묘소에 트로피를 바친 것으로 들었다.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육유(陸游)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왕의 부대가 북방 중원을 평정한 날, 집의 제사에서 너의 부친에게 알리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내가 이름을 날릴 수 있게 된 것은 아버지의 가르침과 관심 때문이다. 당시 아버지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뤘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구리 9단 결혼식에 참석한 이세돌 9단(가운데).
구리 9단 결혼식에 참석한 이세돌 9단(가운데).

―바둑을 언제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자신의 스승은 누구인지, 따르고 싶은 기사를 꼽는다면….

"6세에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의 바둑 행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와 충칭기원 양이(楊一) 원장이다. 기사들은 각자 자기가 가야할 길이 있으며 이를 견지하며 땀을 흘려야 한다. 이것이 변하지 않을 나의 신념이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대국을 꼽아달라고 했다. 그는 많은 대회가 기억에 남지만 이세돌과 둔 몇 개 대국을 소개했다. 먼저 2004년 삼성화재배 준결승. 그는 "당시 이세돌에게 지고 난 뒤 매우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하지만 그 시합도 앞으로 갈 큰 동력을 줬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는 2009년 LG배 결승전. 그는 "당시 이세돌에게 대국에 영향을 미칠 만한 개인적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기의 대결로 불린 대회에서 그를 이겨 행운이라 생각했고 매우 기뻤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2011년 BC카드배 결승전과 2012년 삼성화재배 결승전. 그는 "두 시합에서 모두 패한 뒤 이세돌과 아직 미세한 격차가 있다고 느꼈다"고 고백했다.

―본인에게 바둑이란 무엇인지.

"바둑은 인생과 같다. 사실 인생은 한 판의 바둑과 비슷하고 나는 지휘관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하나하나의 결정과 매 차례의 선택이 모두 의미가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바둑판 위에서 바둑 돌 하나하나가 모두 쓰임이 있는 것과 같다. 바둑에서 일단 돌을 놓고 나면 물릴 수 없다. 기사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있을 뿐이다. 인생 역시 같다고 본다. 이왕 바둑을 선택했으니 매번 좋은 결과를 얻고 싶다. 바둑은 이미 내 생명과 뗄 수 없는 일부분이 됐다."

구리에게 어떤 기사로 기억되고 싶은 지 물었다. 그는 "말보다 행동, 호언장담보다 최선의 노력을 통해 하나하나를 이뤄나갈 것이다. 나머지는 후세대가 평가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바둑 팬들에게 "바둑 세계가 흥미진진해지려면 여러분 개인 개인의 지지 없이는 안 된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바둑의 발전을 성원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구리 9단의 친필 인사. ‘동아일보 팬 여러분 바둑을 더욱 많이 사랑해 주세요. 구리 올림’
구리 9단의 친필 인사. ‘동아일보 팬 여러분 바둑을 더욱 많이 사랑해 주세요. 구리 올림’

◆10번기 4국(신안대국)=이세돌 패해 2-2 원점으로

이세돌은 26일 10번기 신안대국 전야제 행사에서 "세월호 침몰로 온 국민이 애도하는 시기에 바둑을 두게 돼 마음이 무겁다"며 "고향에 왔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구리도 "이세돌의 고향에서 멋진 대국을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이세돌은 27일 대국에서 아쉽게 패했다. 승부는 2-2로 원점이 됐다. 하지만 구리가 이 대국을 포함해 4연승으로 기세를 타고 있다. 다음 달 25일 중국 윈난(雲南) 성 샹거리라(香格裏拉)에서 열리는 5국이 이세돌로서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정상 9단은 "당시 TV화면으로 볼 때는 대국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복기 때 보니 두 기사가 물밑에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고 평가했다.

이세돌은 이날 패배로 내상이 큰 듯했다. 저녁 자리에서 반주로 술을 마신데 이어 구리의 초청으로 그의 방에서 2차, 자신의 방에서 다시 3차에 걸쳐 통음을 했다. 10번기의 산파 중의 한 명으로 이날 이세돌과 3차까지 술을 함께 마신 이영호 씨(이창호 9단의 동생)의 평가는 이랬다.

"10번기 1, 2국에서 연패한 뒤 구리가 무척 힘들어했다. 차오상부동산배에서 이세돌에게 어려웠던 바둑을 이기고 난 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것 같았다. 이세돌도 어려운 시기를 겪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돌이 누구보다 강한 승부사인 만큼 곧 컨디션을 회복할 것으로 믿는다."

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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