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지식인’ 성호 이익 서거 250주년]<3> 성호학 출현의 배경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5일 03시 00분


당쟁으로 집안 풍비박산… 방랑길 현장에서 답을 찾다

김홍도의 풍속화 ‘점심’. 일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둘러앉아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있다. 성호 이익이 살던 시대에는 빈부격차가 심화돼 양반마저 굶주리는 등 민생이 불안정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풍속화 ‘점심’. 일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둘러앉아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있다. 성호 이익이 살던 시대에는 빈부격차가 심화돼 양반마저 굶주리는 등 민생이 불안정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스물여섯 살의 성호 이익(1681∼1763)은 방황하는 ‘청춘’이었다. 집안이 당쟁의 풍파를 맞아 노론정권 아래서는 벼슬할 기대조차 말아야 했다. 좌절한 그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발길은 서울 삼각산(북한산)에서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까지 미쳤다.

젊은 성호의 희망을 꺾은 당쟁은 왜 생겼을까. 누구는 갈라져 싸우기 좋아하는 우리의 민족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지배자들은 이상적인 도덕정치를 이루기 위해 군자와 소인이 따로 나뉘어 붕당(朋黨)을 결성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심지어 율곡 이이는 “붕당이 성할수록 임금은 성인이 되며 백성은 더욱 편안해진다”고 했다.

성호 설명은 이랬다. 밥그릇은 하나뿐인데 굶주린 사람이 열이라면 싸움이 일어난다. 과거급제자는 늘어나지만 관직은 제한돼 있다. 벼슬을 놓고 무리지어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단이 이러했으니 대책도 달랐다. 우선 과거제와 관료제를 개혁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양반에게 다른 호구책을 마련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이 필요하다.

성호 이익의 현실을 직시한 개혁론을 담은 ‘성호사설’. 성호기념관 제공
성호 이익의 현실을 직시한 개혁론을 담은 ‘성호사설’. 성호기념관 제공
바로 이런 생각이 쌓여 성호학이 형성된 것이다. 성호의 붕당론은 자신의 경험에서 유래했다. 성호 집안의 당색은 본래 북인에서 갈라져 나온 소북이다. 인조반정 뒤 남인으로 돌아섰지만 성세는 이전만 못하였다. 성호의 부친 이하진은 숙종 초에 대사헌까지 지냈으나 서인의 탄핵을 받아 평안도 운산으로 귀양 가야 했다. 이 귀양지에서 성호가 태어났다. 게다가 둘째형 이잠마저 노론 외척을 공격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역적집안이라는 말까지 듣진 않았지만 성호는 벼슬의 꿈을 접고 방랑길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성호는 이 방랑길에서 백성이 당면한 현실을 직접 보고 들으며 훗날 개혁론을 구상하는 바탕이 된 ‘현장학습’을 하게 된다.

영조 때 한 암행어사가 지방을 돌아본 뒤 임금에게 보고했던 일화는 당시의 민생경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암행어사가 충청도의 한 양반집 앞을 지나가는데 마당에서 바깥양반이 새끼줄을 손에 들고 엉엉 울고 있고, 그 옆에는 개 한 마리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노부부가 양반인데도 도무지 먹을 게 없어 개를 잡아먹기로 했다. 부인이 부엌에서 개의 목에 새끼줄을 걸고 잡고 있을 테니 남편더러 밖에서 줄을 당기라고 했다. 남편이 줄을 당긴 뒤 부엌에 들어가자 개는 살아있었다. 극심한 가난을 견디지 못한 부인이 대신 목을 매 죽었던 것이다.

숙종 후반기에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는 발전했으나 벌열(閥閱·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과 결탁한 독점상인들이 늘어난 부를 독점한 것이 문제였다. 소수의 부농이 대규모 농사를 지음으로써 대다수 농민은 작은 경작지마저 얻기 힘들었다. 분배의 불균등으로 인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정치권력 또한 노론외척에게 집중됨으로써 그때까지 유지되어 오던 붕당 간의 균형이 파국을 맞았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국민의 좌절감을 반영한 명분의리론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현실에서 민초의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는 실용론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다. 민생을 위해 국가 경영의 틀을 새로 짜는 경세학이 지극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성호학회장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성호학회장
맹자는 하늘이 큰 인물을 낼 때는 반드시 먼저 시련을 안겨 단련시킨다고 했다. 하늘이 장차 조선의 실학을 개척할 임무를 성호에게 부여하려 했음일까. 방랑길에서 현실을 깨달은 성호는 30대 초반에 마음을 다잡고 향리인 경기 안산에 칩거해 정치학 입문서인 맹자부터 읽기 시작했다. 나라를 운영하는 정치의 핵심과 이론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11종에 이르는 경전 공부를 마칠 때쯤인 40대 중반, 마침 경종 임금 아래 소론이 집권하면서 남인에게도 기회가 왔다. 성호의 형 이잠이 신원(伸원)되면서 죄인집안이라는 허물이 벗겨졌다. 이때 성호는 ‘곽우록’을 지어 자신의 경세론을 세상에 드러냈다. 영조의 즉위로 노론이 집권하면서 그의 기대는 다시 무산된다. 경전에서 배운 정치이론은 역사와 현실에서 적용되어 득실이 검증돼야 한다. 40여 년에 걸쳐 저술된 ‘성호사설’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위당 정인보는 1935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에 ‘다산 선생의 일생’을 썼다. 여기서 위당은 다산의 학문적 연원으로 성호를 들고 그 학문적 업적을 높여 ‘해파만리(海波萬里)’라고 했다. 파도가 한 번 일면 만 리까지 미친다는 뜻이다. 성호라는 바다가 일으킨 물결이 다산을 거쳐 만 리를 가려면 오늘날에도 요원하지 않을까? 성호학의 부활과 계승이 기다려지는 까닭이다.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성호학회장
#성호학#출현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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