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발목 잡힌 세계 경제]<上> 반복되는 선거 포퓰리즘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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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경제야! 더 큰 문제는 정치야!!
글로벌 선거의 해… 포퓰리즘 정책에 美-유럽 등 재정절벽서 떨어질수도

“구제금융은 과거의 일이며 다음 주 월요일(18일)이면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긴축정책을 중단해도 유로존은 그리스를 내쫓지 못한다.”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당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38)가 12일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히자 이날 하루 동안에만 그리스 은행에서 7억 유로(약 1조200억 원)의 돈이 빠져나가는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이 발생했다. 17일의 2차 총선에서 승리하면 국제통화기금(IMF) 등과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합의한 긴축정책을 파기하겠다는 것이어서 투자자의 ‘탈(脫)그리스’를 부추겼다.

정치인이 오로지 당선을 위해 대중에 영합할 경우 장기적인 국가 비전이 실종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드시 필요한 정책을 포기하는 등 비상식적인 결정이 나올 수 있다. 특히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집권 욕심에 위기의 근본 해결책은 도외시한 채 표심(票心) 잡기에 급급하게 된다.

이 같은 현상은 선거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으로 대두되고 있으며 세계 경제위기가 되풀이되는 요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올해는 미국 대선 등 주요국 선거가 집중되어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의 재정위기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세계 경제가 ‘정치 프레임’에 갇히면 더욱 탈출구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치프라스 대표는 “유로존이 자금 지원을 중단하면 기존 빚을 갚지 않겠다”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해왔고 지지도가 크게 올랐다. 그는 2차 총선을 앞두고 긴축정책에 시달리는 국민을 향해 “긴축정책을 중단하더라도 유로존에는 계속 남겠다” “유로존에서 탈퇴하더라도 그리스 정부는 현금이 충분하다” 등의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약속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유럽국가 신용등급 부문의 모리츠 크래머 대표는 12일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유로존 지원이 끊어진 뒤 그리스가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책 때문에 유로존에서 탈퇴할 것으로 보이며, 이는 세계 경제에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밝혔다.
▼ “긴축합의 깰것” 그리스 좌파 당수 한마디에 7억 유로 뱅크런 ▼

프랑스에서도 사회당 소속 대통령이 당선되고 의회도 장악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전 정권이 위기극복을 위해 마련한 재정 개혁안들에 역행하는 조치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지난달 17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뤄낸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2010년 재정적자 해소 방안으로 국민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통과시켰던 연금개혁법안을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연금 수령 시작연령을 62세에서 다시 60세로 환원시킨 것.

올랑드 대통령이 이끄는 사회당과 녹색당 등 좌파 정당 연합은 17일 결선 투표를 치르는 총선에서도 승리해 의회를 장악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좌파 정책이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페어 슈타인브뤼크 전 독일 재무장관은 최근 독일 주간지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연금 시작연령을 낮추는 올랑드 대통령의 정책 제안은 프랑스 신용등급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국제신용평가사는 최고 신용등급(AAA)을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에 대해 재정적자(지난해 국내총생산 대비 5.4%)를 낮추지 않으면 등급을 강등시키겠다고 수차례 경고했다.

최근 은행권에 1000억 유로(약 164조 원)의 구제금융을 약속받은 스페인은 유럽 정치권에 또 다른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스 아일랜드 등과 달리 재정 긴축 조건 없이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야당의 압박에 못 이긴 엔다 케니 아일랜드 총리는 “(스페인처럼) 모든 유로존 회원국에도 같은 행동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며 구제금융 재협상을 촉구했다. 당초 긴축정책을 추진하겠다며 지난해 11월 집권한 스페인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의 개혁 의지도 3월 열린 지방선거에서 긴축 반대를 주장한 좌파 정당이 승리하자 흔들리고 있다.

일본도 최악의 재정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가 소비세(부가가치세) 인상안을 추진하고 있으나 선거에서 무더기 낙선을 우려해 집권 민주당 내에서조차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제위기의 불씨를 진화하기는커녕 키우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지난해 8월 국가부채 한도 증액 합의에 실패해 사상 초유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사태를 맞았던 미국은 협상 시한을 올해 말까지 연장했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협상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회복을 위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제출한 일자리 창출법안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올해 말로 종료되는 중소기업 세금 및 근로소득세 감면안 연장에 대해서도 협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 의회예산국은 국가부채 한도 증액에 실패하면 재정지출이 내년에 6070억 달러 감소해 내년 상반기 경제성장률이 ―1.3%를 기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최근 의회 연설에서 “(이 같은 상황이 도래하면) 미국은 재정 절벽(fiscal cliff)으로 떨어져 미 경제는 다시 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재무장관이었던 래리 서머스는 “경제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정치권이 너무 분열됐으며 선거 후에나 막판 타협을 시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도 최근 ‘지금 이 디플레이션을 끝내라’라는 신간에서 세계 경제회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으로 정치권을 지목했다. 그는 미 공영 라디오방송인 NPR와 가진 인터뷰에서 “모든 미국 정치인들이 경제학원론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제신용평가사들은 “글로벌 경제의 가장 큰 리스크는 리더십이 실종된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 리스크”라는 진단을 한목소리로 내놓고 있다.

뉴욕=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구제금융#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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