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한지(韓紙)에 대한 생각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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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희망, 한지에 혼합재료, 한을순. 그림 제공 포털아트
풍요-희망, 한지에 혼합재료, 한을순. 그림 제공 포털아트
가끔 마음이 어지러울 때 한지를 펼쳐 놓고 붓글씨를 씁니다. 마음에 새기고 싶은 글귀를 옮기거나 여백이 많은 그림을 그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쓰지도 않고 그리지도 않고 묵묵히 앉아 한지만 들여다보다가 자리를 벗어날 때도 있습니다. 억지스럽게 무엇을 그리거나 쓰는 것보다 그렇게 묵묵히 앉아서 흰 여백을 들여다보는 게 더 편하고 깊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빈 여백, 하지만 그것 자체로 이미 충만한 느낌이라 쓰고 그리는 행위마저 무색해집니다. 동양적 여백이 완성되는 순간, 행하지 않고도 완성되는 신비, 그것은 오직 한지라는 독특한 세계성 안에서만 가능한 경험입니다.

21세기, 우리 주변에서 한지를 경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한지가 우리에게 외면당하고 우리 삶의 영역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종이 제품을 엄청 많이 쓰지만 우리 고유의 종이인 한지가 아니라 펄프 제지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외국에서는 한지의 우수성을 뒤늦게 발견하고 다양한 찬사를 보내는데 정작 우리는 그것을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가볍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한지는 닥나무 줄기를 삶아 닥풀을 만들고 그것으로 종이를 떠낸 것입니다. 창호지를 많이 쓰던 시절에는 그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지만 요즘처럼 서양식 주거문화에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지는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바람과 빛을 통과시키고 습도를 조절해 신축성과 단열효과가 뛰어납니다. 그래서 한지는 천년 세월이 지나도 삭지 않고 썩지도 않습니다. 교과서나 신문지처럼 펄프를 사용한 종이는 몇 년 지나면 누렇게 빛이 바래지만 한지는 변함이 없어 살아 있는 종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중국 역대 제왕의 진서(珍書)를 기록하는 데 고려의 종이만 썼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구한말 러시아 대장성의 보고서인 ‘한국지’에는 ‘한국의 종이는 섬유를 빼어 만들므로 지질이 서양 종이처럼 유약하지 않고 어찌나 질긴지 노끈을 만들어 쓸 수도 있다. 종이에 결이 있어 그 결을 찾아 찢기 전에는 베처럼 베어지지를 않는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숙종 9년에는 ‘근래 한량들이 종이신 신는 것을 멋으로 알아 이를 만들어 파는 자가 많아지자 사대부 집에서 서책(書冊) 도둑질이 심하니 이를 단속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적도 있습니다. 한지로 신발, 등잔, 물통, 대야, 요강까지 만들어 썼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지의 부드럽고 질긴 성질은 우리 고유의 민족성을 닮아 창의적이고 역동적이고 또한 미래지향적입니다. 한지 그 자체가 이미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미를 완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천년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백 가지가 넘던 한지의 종류는 고작 네다섯 가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전수하기 위해 땀을 흘리는 사람들, 그것을 활용해 갖가지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의해 한지는 새로운 도약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한지로 만든 스마트폰, 한지로 만든 태블릿PC, 한지로 만든 가구, 한지로 만든 양복, 한지로 만든 돈….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21세기에 걸맞은 가변성으로 한지는 온 세상에 다시 펼쳐져야 합니다. 마음이 어지럽거나 창의적인 영감이 필요할 때, 텅 빈 한지를 앞에 놓고 조용히 들여다보세요. 한지에서 무궁무진한 영감이 솟아나 마음이 한없이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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