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칼럼]“후회 없이 던졌다” 별이 된 최동원…영화 ‘퍼펙트 게임’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27일 13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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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최동원 선수의 전성기를 그린 영화 '퍼펙트 게임'
● 진짜 '부산 싸나이'에 대한 향수…그리고 추억

'불세출의 투수이자 영원한 에이스' 최동원이 9월14일 오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故 최동원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연세장례식장 모습.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불세출의 투수이자 영원한 에이스' 최동원이 9월14일 오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故 최동원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연세장례식장 모습.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얼마 전 한국 야구계의 신화 최동원 선수께서 별세하셨지요. 오늘은 그 분의 이야기를 써 볼까 합니다. 마침 그에 대한 영화 '퍼펙트 게임'도 개봉을 준비 중이기도 합니다.

저는 야구팬이 아닙니다. 축구는 가끔 챙겨봅니다만 그 외의 스포츠에는 문외한이나 가깝습니다. 하여 최동원 선수가 가진 여러 기록이나 그의 구질이 기술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는 잘 모릅니다. 오히려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 분의 인생드라마입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인 1970년대에는 고교야구의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최동원 선수는 고교야구 최고의 스타였습니다. 경남고 2학년이던 1975년 당시 최강팀인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 다음해 '역전의 명수'라 불리던 군산상고에게 탈삼진 20개를 잡아내며 돌풍을 일으킨 것이죠.

그 시절 사진을 찾아보면 차가운 인상에 금테 안경을 쓴 모습이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 마동탁을 연상시킵니다. 준수한 외모를 가진 고교야구 최고의 투수. 냉정한 표정으로 묵묵히 공을 던지는 그의 모습에 당시 많은 여학생들이 가슴앓이를 하지 않았을까요?

연세대에 진학한 그는 놀라운 기록을 이어갑니다. 1978년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 이틀간 이어진 준결승을 맞아 연장 18회의 혈전을 벌입니다. 사실 이것만 해도 믿기지 않는 기록인데 최동원은 바로 몇 시간 뒤 있었던 결승에 다시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릅니다.

■ 무쇠팔 최동원의 탄생

아마 당시 경기를 지켜보신 분들은 입이 떡 벌어졌을 겁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하면서 말이죠. 이틀 동안 최동원이 던진 공은 27이닝 동안 92명의 타자를 상대로 375개였다고 합니다. 그를 부를 때면 으레 따라붙는 '무쇠 팔'이란 수식어는 그냥 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무쇠 팔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좀 무모해 보입니다. 자기 몸 관리가 바로 성적으로 이어지고 성적은 바로 자신의 가치가 되는 요즘 세상에 이렇게 자기 몸을 혹사시키는 것은 바보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프로 스포츠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고 '의리'와 '우리'를 우선시 했던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는 스포츠 선수 이전에 팀과 경기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은 '진짜 싸나이' 였던 거지요.

대학을 졸업 한 후, 그는 실업팀 롯데에 입단합니다. 그리고 뗄래야 뗄 수 없는 롯데와의 애증관계가 시작됩니다.

사실 초창기 롯데는 그야말로 '최동원의 롯데' 였습니다. 최동원은 거의 모든 경기에 등판해 거의 모든 경기를 이겼습니다. 1주일이면 6번 마운드에 오른 적도 있습니다. 뚜렷한 타선의 지원이나 구원투수 없이 오로지 혼자서 롯데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심지어 프로야구 첫 우승을 거머쥐었던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최강 삼성을 상대로 5번 등판했고 4번을 이겼습니다. 이 다섯 번의 등판 중 네 번이 완봉, 또는 완투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혼자 던지고 혼자 싸우고 혼자 이긴 겁니다.

당시 다른 대안이 없었던 롯데의 감독은 최동원 선수에게 연이은 등판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최동원 선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야구팬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많이 회자되고 있는 말입니다.

"알겠심더, 한 번 해 보입시더."

부산의 야구사랑, 자이언츠 사랑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팀을 위해 던지고 이길 때까지 던지는 그의 뚝심과 의리는 부산 시민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약체 롯데에게 매번 놀라운 승리들을 안겨다 주었으니 부산 시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어떠했을 지는 상상이 갑니다.
최동원 투구가 1984년 10월9일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마지막 타자 장태수를 삼진으로 잡고 우승을 확정지은 뒤 포수 한문연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그에 대한 영화 \'퍼펙트 게임\'이 만들어져 곧 영화팬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최동원 투구가 1984년 10월9일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마지막 타자 장태수를 삼진으로 잡고 우승을 확정지은 뒤 포수 한문연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그에 대한 영화 \'퍼펙트 게임\'이 만들어져 곧 영화팬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연합뉴스.


■ 롯데 자이언츠 팬 600만의 정신적 지주

현재 600만 야구관중 중 절반이 자이언츠 팬이고, 이들을 끌어 모은 오리지널 원동력은 최동원이었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롯데는 최동원 선수에게 큰 빚을 진 겁니다.

최동원 선수의 경기에는 투혼이 있습니다. 그는 경우의 수를 따져가면서 꾀를 쓰는 투수도 아니었고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세련된 투수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을 필요로 할 때면 늘 마운드에 오르는 불꽃 같은 투수였습니다. 그리고 마운드에 서면 정면 승부를 하는 풍운아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선동렬 선수와 비교합니다. 고교 시절부터 최고를 독차지했던 최동원 선수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라이벌이라고요. 하지만 세기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이 두 사람이 맞붙은 것은 프로에서 단 세 번뿐이었습니다.

두 선수는 두 번째 경기까지 각각 1승 1패를 거두며 승부를 내지 못했습니다. 다섯 살의 나이차로 각자의 전성기는 달랐지만, 서로를 무척이나 의식하고 견제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세상은 그들의 대결을 원했겠지요. 그리고 마침내 1987년 5월 16일, 그들의 마지막 대결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경기에서 둘은 연장 15회까지 가는 사투를 벌였습니다. 더 이상 던질 이닝이 없을 때까지 던졌습니다. 이날 최동원이 던진 투구는 209개, 선동렬이 던진 투구는 232개. 4시간 56분 동안 이어진 경기는 결국 2-2 무승부로 막을 내립니다.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대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불세출의 두 투수는 끝내 우열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역감정이 심했던 80년대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 고대와 연대, 해태와 롯데라는 완벽한 라이벌 구도를 가지고 있는 이 둘의 대결에서 어느 한 쪽이 이겼다면, 그야말로 전쟁이 났을 지도 모른다고요.

세기의 명승부라 불려지는 이 경기는 현재 <퍼펙트 게임>이라는 영화로도 제작 중입니다. 고 최동원 선수 역에는 조승우가, 선동렬 선수 역에는 양동근이 캐스팅되었습니다. 제작에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최동원 선수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끝내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야구팬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이 대결이 있은 후 바로 다음해인 1988년, 최동원 선수는 충격적인 트레이드를 당합니다. 롯데는 그를 대구 출신의 삼성 에이스 김시진과 맞트레이드 합니다. 이유는 바로 '상조회 설립'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억대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 부자였습니다. 결혼을 앞둔 서른 즈음, 이제는 좀 편한 인생을 찾을 나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는 다른 동료들을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의 김대현 선수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후 가족의 생계까지 어려워지자, 그는 선수끼리 서로 돕자는 의미로 상조회 설립을 추진합니다.

이 상조회가 노조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구단들은 주도자들에게 가혹한 보복을 가합니다. 민주화 열풍으로 노조라면 기업들이 경기를 일으키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무관치 않았을 겁니다. 하여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고, 롯데에 야구 인생을 바친 최동원 선수는 구단에서 일시에 방출됩니다.

사실상 그의 프로선수 생활은 여기서 끝이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꼿꼿한 성격의 그는 삼성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년 후 은퇴를 하고 마니까요. 서른 둘, 참 젊은 나이였습니다.

최동원 선수는 당시의 충격을 '나무가 뿌리까지 뽑히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용기를 낸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습니다.

■ 슈퍼스타의 불운한 말년…하지만 꺾이지 않은 자존심

故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의 발인이 16일 오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됐다. 가족 친지들과 야구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故 최동원 감독의 아들이 영정을 들고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다. 전영한기자 scoopjyh@donga.com
故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의 발인이 16일 오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됐다. 가족 친지들과 야구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故 최동원 감독의 아들이 영정을 들고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다. 전영한기자 scoopjyh@donga.com
이후 그는 한참 동안 야구계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반항아'라는 낙인이 찍힌 그를 어떤 구단도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야구계 바깥에서 야인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소신을 밝히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하기도 하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며 명예와 부를 누리는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그리고 프로에서 만개해 최고의 투수라는 칭송을 받던 라이벌 선동렬과는 달리, 그는 외진 곳에서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가 복귀한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인 2001년. 한화의 투수코치라는 소박한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2007년, 대장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친정 롯데에는 결국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부쩍 수척해진 그의 모습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최동원 선수는 끝까지 '살을 좀 많이 뺐을 뿐'이라 말하며 병을 숨겼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자존심은 병마저도 이길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53세. 너무도 젊은 나이에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구를 팔자로 알고 인생으로 알았던 그는 한국 야구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기고 불꽃같이 사라졌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과 부산 사직구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야구팬들뿐만 아니라 '인간 최동원'을 추모하기 위한 생면부지의 발걸음도 줄을 이었다고 합니다.

1987년 5월 16일, 일생일대의 경기를 끝낸 서른 살의 최동원 선수는 스물다섯 살의 라이벌 선동렬 선수와 웃으며 악수를 했습니다. 이를 담은 한 장의 사진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후회 없이 던졌다."

정주현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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