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출발은 '사회 정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었다. 3대째 가업을 이어온 곰탕집 아들로 공부와는 일찌감치 담 쌓고 카바레를 드나들며 춤바람을 즐기던 그 남자. 그것도 모자라서 "소는 어린 암소가 좋지만 여자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야 좋다"는 말로 아버지를 기함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날라리 '고삐리'에게 사회 정의란 가당치 않은 언어도단에 불과하다.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다. 달콤한 화술과 현란한 춤 솜씨로 동네 카바레를 주름잡다가 아버지에게 걸려 도망치던 버스 안에서 보게 된, 당찬 여자를 도와주다가 국회의원 아들과의 싸움에 휘말리면서 시작된 운명이었다.
그는 그저 잘잘못을 따지기도 전에 국회의원의 서슬 퍼런 호통에 하나 뿐인 아들의 장래가 걱정된 아버지가 국회의원의 구두를 핥는 모욕을 당한 뒤 '국회의원 잡는 검사'가 되겠다며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을 뿐이다. 만약 못난 아들 때문에 모욕당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성추행범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차게 대응하는 아나운서 지망생인 연상의 여자에게 '멋진 남자'가 되어 당당하게 프러포즈하고 싶었던 마음에서 사법시험 공부에 몰입한 것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2010년 대한민국 현직 검사들이 이상적인 역할 모델로 꼽는 하도야(권상우 분)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기획 의도에서 시작한 정치드라마 '대물'에서 하도야는 방송사 아나운서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마침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서혜림(고현정)을 도와주는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원칙과 상식에 입각하여 국민을 위한 정치를 실천하던 서혜림이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게 되면서 하도야는 '서혜림의 키다리 아저씨'에서 부패 정치인의 비리를 파헤치는 '정의로운 열혈 검사'로 자리를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하도야에게 검사는 여전히 소소한 개인적 바람이 만들어준, 폼 나는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
'복근 도야'라는 별칭에 걸맞게 완벽 복근으로 단련된 몸을 던져 호스트바 불법 성매매 사건을 기획 수사해 유력 정치인의 부인을 기소하는 배짱. 그 사건을 무마시키려는 정치인이 만든 술자리에서 자기 몫의 술값을 지불하고 먼저 일어서는 당당함에 이어지는 술집 아가씨와의 애정 행각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는 곧 하도야가 껄렁거리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꼴통'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는 전혀 상관없던 '날라리 고삐리' 출신이었기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행동들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검찰청 상관의 은근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호스트바 사건의 피의자를 기소하면서 능청스럽게 "사회 지도층답게 살라는 의미에서 한 번 때려봤습니다. 호빠는 좀 거시기 하잖습니까"라고 말하는 하도야에게서 부패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정신보다 검사 윤리강령을 폼 나게 실천하겠다는 '폼생폼사'의 느낌이 더 강하게 풍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멋지고 폼 나게 살고 싶은 하도야를 변화시킨 건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으로 묻어둔 서혜림이 맞닥뜨린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남편의 죽음으로 국가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 극도에 달해 국회의사당 앞에서 비를 맞으며 "내 아이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며 절규하는 서혜림. 그녀를 지켜보면서 검찰 마크가 선명한 우산을 씌워주는 하도야의 행동은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국민을 위해 검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종군기자로 취재 활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남편의 죽음이 서혜림의 정치적 자각으로 이어지고 국가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는 서혜림의 분노가 하도야의 잠재된 정의감을 일깨워준 것이다.
'서혜림의 키다리 아저씨'로서의 행동은 여전하지만 하도야는 비로소 공공의 적을 향해 사정의 칼날을 겨누는 정의로운 검사가 된다. 그리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하도야는 집권 여당 대표 조배호(박근형)의 비자금 의혹 수사에 착수하지만 정치권력의 거대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고향의 지청으로 좌천되고 만다.
하지만 좌천 이후에도 하도야의 정의감은 식기는커녕 더 활활 불타오른다. 자신이 검사가 되는 계기를 제공했던 여당 국회의원의 비리 혐의를 수사하던 하도야는 보궐선거 비용을 생각해서 적당히 넘어가자는 지청장의 말에 강력하게 반발할 정도로 열혈 검사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비리 국회의원이 착복한 국민 혈세에 비하면 보궐선거 비용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지청장을 설득하면서 "들판에 쥐새끼들이 득실거리는데 어찌 풍요를 바라겠습니까. 풍요를 바란다면 쥐약을 뿌려서라도 쥐새끼들을 박멸해야"한다는 하도야의 주장은 정의로운 검사의 의무를 역설한 것에 다름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사정의 칼날로 부패 집단을 척결해서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로 충만한 하도야는 여당 국회의원의 비리를 수사하다가 조배호에게 흘러들어간 비자금의 일부를 확인하게 된다.
조배호가 고가의 미술품을 주기적으로 사고팔아 제3국 은행에 비자금을 예치한 단서를 확보한 것이다. 하도야는 당장이라도 조배호를 지청으로 소환하겠다고 소리치지만, 검찰청 핵심부의 눈치를 보던 지청장의 만류로 방문 조사를 선택한다.
그 대신 하도야는 신상명세 몇 가지로 조배호를 장시간 앉혀놓음으로써 권력 실세의 굴욕감을 자극할 정도로 용의주도하게 심리전을 펼친다.
살아 있는 권력 실세와의 심리전을 대담하게 펼칠 정도로 용감한 하도야지만 서혜림에게는 여전히 '키다리 아저씨'로 남아 있다. 우여곡절 끝에 보궐 선거에 출마해 간발의 차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서혜림을 '아줌마'라고 부르며 사랑의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는 하도야에게서 능수능란하게 여자를 휘어잡았던 카사노바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없다.
할머니와 함께 고향에서 생활하는 서혜림의 아들을 돌봐주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도야의 모습은 오히려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로맨티스트에 가깝다.
사랑의 감정 표현에 서투르고 감정 조절조차 못하는 하도야의 순진함은 서혜림을 정치에 입문시킨 여당의 실세 강태산(차인표)에 대한 질투심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개혁 정치를 표방한 강태산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서혜림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하도야는 '불륜' 운운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깐죽거리다가 서혜림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스러움을 깐죽거림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하도야의 철없음은 때로는 그를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장난스럽게 건들거리면서도 박력 넘치는 그에게서 사랑을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슬픔의 정서가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이다.
'대물'의 하도야는 사회 정의 실현의 주체라는 점에서 한 때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명작 '모래시계'의 강직한 검사 강우석(박상원)과 닮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강우석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원칙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 20세기가 요구한 검사였다면, 하도야는 개인적 바람이 공정하게 실현되는 변화된 사회상이 반영된 21세기에 어울리는 검사라 할 수 있다.
자유분방한 열혈 검사 하도야에게 진지함과 껄렁함이 공존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지향해야 할 역사성과 시대정신이 탈각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고 야성적인 매력과 사랑에 빠진 청년의 순수함이 공존하는 하도야가 개인적 바람의 차원을 넘어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정치와 경제 권력 앞에서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라는 진실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서민들의 가슴을 울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도야는 현실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그래서 공정한 법 집행을 바라는 대중의 기대감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검사일 뿐이다. 부패한 현실이 잉태한 열혈 검사 하도야에게 열광하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드라마의 정의가 현실에서 구현되는 세상은 언제쯤 가능할까?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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