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한일강제병합 100년의 일왕 방한

  • 입력 2009년 8월 28일 03시 00분


#스무 살 남짓 됐을까.

앳돼 보이는 일본 처녀 2명이 내 눈길을 끈 것은 일본의 한 호텔 조식 뷔페에서였다.

옆자리에서 식사를 마친 그들은 접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은 접시들을 포개어 각각 1인용 사각쟁반 위에 올린 뒤, 그 옆에 수저와 포크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곤 일어서서 자신들이 앉았던 의자를 테이블 밑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조용하지만, 신속하게 정리를 끝내고 일어서는 그들을 보면서 뷔페 접시는 원래 종업원들이 치워주는 걸로만 생각했던 나도 ‘어쩔 수 없이’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다.

최근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 음식점에서 본 또 다른 풍경.

우리 일행과 마찬가지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던 한 중년 여성이 카운터의 지배인을 찾아가 뭔가를 얘기한다. 그런데 너무 공손하다. 두 손을 다리에 붙이고 연방 고개를 숙이면서 사정하듯 말한다. 지배인도 고개를 숙이고 경청한 뒤 알았다는 듯이 90도로 인사한다.

서울 거리 곳곳에서 예의 없는 젊은이들, 범절 없는 악다구니와 마주치곤 했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일본인을 만나보면 ‘지구상에 이만큼 예의바른 민족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 의문은 거기서 출발한다. 도대체 이처럼 예의바르고, 남에게 피해 주길 너무나 꺼리는 민족이 어째서 그렇게 잔악무도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동아시아에 무자비한 식민통치를 자행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한일강제합방 100년이 다 되도록 진심의 사과를 안 하는 건지….

#“빨간 신호등, 모두 함께 건너면 두려울 것 없다.”

일본인의 집단주의적 국민성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국민성이 과거 식민지배와 태평양전쟁 때의 집단광기로, 전후에는 과거의 잘못에 눈을 감아버리는 집단최면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원인이 뭐든, 문제는 미래다. 내년은 한일강제합방 100년, 광복 65년이 되는 해. 언제까지나 과거에만 얽매일 순 없다.

때마침 일본 열도에서는 총선이 치러진다. 30일 총선에선 전후 일본 정치를 지배해 온 자민당이 민주당에 정권을 넘겨줄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과거사나 동아시아 외교 문제에서 자민당보다 유연하다. 한일강제합방 100년을 앞두고 일본에 사실상 전후 첫 ‘정권교대’(일본인들이 ‘정권교체’ 대신 쓰는 용어)를 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는 건 의미심장하다.

#사석에서 만난 재일교포 3세 기업인은 “내년에 천황(일왕)이 방한하면 꼬이고 얽힌 한일관계 100년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일본혼의 정수(精髓)’인 일왕이 한국을 방문해 ‘진솔한 사과’를 한다면 일본인의 내면의식도 흔들릴 수밖에 없고, 한국민의 응어리를 푸는 데도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했다.

1992년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중국을 방문해 사죄했다. 일왕의 방중은 같은 해 일본을 방문한 장쩌민(江澤民) 당시 공산당 총서기의 적극적인 초청으로 성사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4월 방한 초청을 했지만 일본의 ‘정권교대’를 계기로 양국 정부가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왕의 방중은 일-중 수교 20주년에 이루어졌다. 내년은 한일 수교 45주년이 아닌가. 무엇보다 ‘100년의 응어리’를 그대로 안고 가기엔 앞으로의 100년이 너무 아깝다.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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