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56>

  • 입력 2009년 8월 11일 13시 52분


석범은 유리물고기가 박힌 문고리를 쥐기 전에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서사라와 남앨리스가 함께 실종되었다. 결승전 새벽에 사라가 향한 곳을 알만한 이는 볼테르뿐이다. 둘은 그 밤을 함께 보낸 특별한 사이니까. 글라슈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사라가 결승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그녀가 경기장에 올 수 없는 처지임을 반증한다. 그런데 왜 볼테르는 연인이 사라졌는데도, 보안청에 신고하지 않고, 2층에서 로봇이나 손보며 시간을 보내는 걸까. 사라는 어디로 갔는가. 어디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을까.

손가락 하나 겨우 들어갈 만큼 열고 인기척을 살폈다. 귀를 기울였지만 조용하다. 한 뼘 정도 문을 더 열고 머리를 반 만 밀어 넣었다. 언제든지 물러설 수 있도록 뒷발에 무게중심을 실었다. 흉기를 지닌 살인자를 쫓으면서 생긴 습관이다. 단 한 번의 방심에 생명을 잃는다.

좌우로 늘어선 로봇들만 눈에 띄었다. 로봇 사이 어둠을 노려보았지만 살기는 없었다. 볼테르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방에 틀어박혀 잠시 눈이라도 붙이는가.

격투 로봇들을 하나하나 지나쳤다. 내부 상태는 모르겠지만 외형만은 찢어지고 구멍 뚫리고 찌그러든 흔적이 전혀 없이 깨끗했다. 글라슈트가 갈기갈기 찢어놓은 로봇들도 어느새 제 모습을 갖췄다.

글라슈트는 출구 쪽을 향해 외따로 서 있었다. 다른 로봇들과는 달리 치열했던 결승전의 흔적이 온몸에 가득했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배틀원 2049'에 입상한 로봇들을 살폈다. 무사시, 졸리 더 퀸, 자이언트 바바III, M-ALI. 역시 깨끗하고 멋있다.

석범은 보았다. 결승전 승리의 환호성 속에서도 오직 볼테르 혼자만 요동치지 않았다. 만감이 교차한 탓에 발을 뗄 힘도 없기 때문일까. 오랫동안 갈망한 우승이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몸은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더운 눈물 두 줄기 정도는 흘려야 하는 것 아닐까.

"누구요?"

귀신처럼, 글라슈트의 등 뒤에서 볼테르가 쓰윽 고개를 내밀었다. 석범이 걸음을 멈추고 엉거주춤 오른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볼테르는 인사도 받지 않고 다시 글라슈트 등 뒤로 사라졌다.

"어제 새벽, 서사라는 어디로 갔습니까?"

석범은 글라슈트의 왼팔을 쓸면서 돌았다. 분리하여 벽에 기대놓은 글라슈트의 등판을 하마터면 걷어찰 뻔했다. 시간이 없었다. 볼테르는 글라슈트의 등을 들여다보며 손을 놀리느라 바빴다.

"두 사람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볼테르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두 사람이라뇨?"

아차!

볼테르는 아직 석범과 앨리스가 그의 집 앞에서 잠복한 사실을 모른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남앨리스 형사와 서사라 트레이너입니다. 남 형사가 서 트레이너를 따라 갔는데, 둘 다 연락이 끊겼습니다."

볼테르가 고개를 돌려 석범을 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따라 갔다? 미행했다 이겁니까? 죄도 없는 사람을 미행해도 좋다고 누가 당신들에게 허락을 했습니까?"

"지금 그딴 걸 따질 여유가 없습니다. 서 트레이너의 행선지를 알려 주십시오. 어딥니까?"

볼테르의 입가에 비웃음이 맴돌았다.

"은 검사님! 행선지를 알면 내가 글라슈트 등판이나 매만지고 있겠습니까?"

"모른다?"

"모릅니다. 연구소 밖 서 트레이너의 일상을 아는 이는 없소."

"두 분…… 연인 사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연인이면 꼭 서로의 일상을 전부 알아야 합니까? 솔직해 집시다. 뭘 알고 싶은 거요? 혹시 내가 서 트레이너와 남 형사를 납치해서 죽이지나 않았는지 의심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최 교수님은 알리바이가 확실하니까요. 집에서 나와 곧장 SAIST 연구소로 향했고, 또 거기서 결승전이 열리는 상암동 경기장으로 갔습니다. 그 사이 서 트레이너나 남 형사와 만났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볼테르가 석범의 말꼬리를 잡아챘다.

"꼭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요? 직접 만났을 가능성이야 없지만…… 하수인 몇만 두면 떳떳하게 알리바이를 만들면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상황 아닙니까? 내가 진짜 연쇄살인마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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