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장훈]‘DJ 틀’에 20년째 갇힌 민주당

  • 입력 2009년 8월 7일 02시 59분


평양에서 내내 굳은 표정이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북한에 억류된 여기자 2명과 함께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우선 까다로운 상대인 북한으로부터 인질 석방이라는 성과를 안고 돌아감으로써 인권과 민주주의의 확산에 노력한다는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게 됐다. 자신의 임기 말인 2000년 후반에 직접 하려다가 참모들의 만류로 포기했던 평양행이었지만 뒤늦게나마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실현한 점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편 같은 2000년에 역사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클린턴의 방북 시점에도 여전히 병상에서 사투를 벌인다. DJ의 투병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는 모두 나름의 입장에서 그의 역사적 공과를 하나하나 짚어 보게 된다. 그런 가운데 필자에게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점이 DJ의 시대, DJ의 논리에 여전히 갇힌 민주당의 사정이다(한나라당이라고 크게 나을 것도 없지만). 얼마 전 미디어발전법안을 둘러싸고 의사당에서 벌인 육탄전을 통해 민주당은 민주주의 2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DJ의 민주화운동 시대로부터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나이는 먹는데도 키가 자라지 않는 오스카(독일 작가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처럼 민주당은 20여 년째 DJ가 닦아 놓은 민주화운동의 시대, DJ라는 민주화 영웅의 전설 속에 갇혀 있다. 첫 번째 근거는 민주당이 여전히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시야로만 우리 정치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민주화 운동 - 민주정치’ 혼동

민주당에 미디어발전법을 추진하는 정부, 여당은 오직 방송 장악을 통해 재집권을 꿈꾸는 사악한 집단으로 이해된다. 미디어발전법의 내용에서 미래지향적 요소는 발견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민주주의의 적이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일 뿐이다. 미디어 악법을 막는 일이 민주당의 역사적 사명이며, 이를 위해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정당화된다고 믿는다. MB 악법의 저지라는 도덕적 결단 앞에서 국회의 절차와 질서는 거추장스러운 형식일 뿐이며, 시간이 지나면 국민은 수단의 졸렬함에 대한 비난보다는 악법을 막아냈다는 명분에 지지를 보내리라고 민주당은 오늘도 믿으면서 길거리의 삼복더위를 참아낸다.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할 수 없는 민주주의 정치의 무대에서 민주당이 선악의 이분법을 신봉하는 이유는 민주화운동 시대의 투쟁과 민주주의 시대의 정치를 여전히 혼동하기 때문이다. DJ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던 시대는 권위주의라는 악과 민주주의라는 선의 세력이 다투던 시기였다. 하지만 국민의 한 표 한 표가 모여 권력을 결정하고, 그 권력은 엄정한 감시를 받는 민주주의 환경에서 진리는 본질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몇 해 전 민주당이 추진하던 4대 개혁 법안에 미래지향적 요소가 없지 않았듯이, 미디어발전법은 변화하는 기술 환경에 대응하는 측면을 담고 있다. 이처럼 가치가 상대화되는 시대에, 선악의 이분법을 붙든 민주당은 타임머신을 타고 온 이방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20년 전 민주화운동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또 다른 근거는 영웅주의 때문이다. 권위주의와 민주화운동의 격렬한 충돌은 흔히 영웅을 탄생시킨다. 한국 민주화운동이 DJ를 탄생시킨 것처럼 폴란드의 민주화는 바웬사를, 체코의 민주화는 하벨이라는 영웅을 만들었다. 시민들의 가냘픈 희망이 용기 있는 지도자에게 집중되면서 신성불가침의 영웅이 탄생했다. 오늘날 뚜렷한 대선주자를 보유하지 못한 민주당은 ‘악법저지 투쟁’을 통한 영웅 만들기에 골몰한다. 민주당 지도부가 단식을 하고, 염천(炎天)의 광장으로 나가 목청을 높이는 일은 영웅 만들기의 안간힘에 다름 아니다.

무모한 ‘영웅 만들기’ 그만둬야

유감스럽게도 민주화 이후, 하벨이나 바웬사의 추락에서 보듯이 민주주의의 시대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도, 영웅이 생존할 수도 없는 환경이다. 끝없는 이해다툼을 조정하면서, 가능성의 예술을 추구해야 하는 민주정치의 지도자는 영웅보다는 곡예사의 운명에 가깝다. 끝없는 검증 앞에 서 있는 민주정치 지도자는 신성불가침의 영웅이라기보다는 성실한 정책전문가에 가깝다. 결국 민주당의 영웅 만들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무한도전인 셈이다.

2012년을 향해 가는 민주당의 현대화는 DJ의 영웅 신화를 넘어서면서 시작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DJ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역설한 것은 적절하진 않았지만 민주화 영웅의 발언으로는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포스트 민주화 시대의 한 축을 책임질 민주당이 20년 전 민주화 투쟁의 프레임에 매달리는 한, 시대와 민주당의 불화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영웅의 신화를 기억하는 일과 영웅의 재림을 기다리는 일은 천양지차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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