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핵 이용과 핵 주권

  • 입력 2009년 6월 2일 02시 59분


호주와 일본은 비핵화 운동에 앞장서는 나라다. 이들 두 나라는 2010년 8월로 예정된 핵확산금지조약 평가회의(NPT review conference)가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하도록 범세계적인 운동을 전개하는 중이다. 2000년의 경우 핵군축 및 핵 비확산을 위한 몇 가지 실질적인 조치를 포함한 최종 문서를 채택했지만 2005년 회의는 핵무기가 더는 확산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기존의 핵보유국과 핵보유국이 핵무기를 줄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비핵보유국이 설전을 벌이는 중에 의제도 합의하지 못한 채 폐막됐다.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는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핵 강국 못지않은 기술 능력을 가진 일본과 호주가 핵무기를 포기하고 ‘핵무기 없는 세계’를 구현하는 운동에 앞장서고 있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들이 펼치는 핵 평화 운동은 핵군축, 비확산, 평화적인 핵 이용이라는 세 개의 기둥(pillar)이 떠받친다.

2010년 NPT 평가회의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동안 핵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받는 뉴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뉴스로는 세계의 주요 인사가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를 없애자는 ‘제로 옵션(zero option)’ 운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샘 넌 전 상원 군사위원장,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등 한때 미국의 외교국방을 주도했던 거물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2008년 1월 공동 집필한 글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Toward a World Free of Nuclear Weapons)’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2010년을 원년으로 삼자고 주창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금년 4월 5일 체코 프라하에서 행한 연설에서 핵무기가 없는 세계 구현을 위한 미국의 의지와 구체적 실천계획을 천명하고 “이것이 내 생전에 실현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언급했다.

日‘비핵화’ 외치며 농축-재처리

이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부정적인 뉴스도 있었다. 이란이 핵무기 양산이 가능할 정도의 대규모 우라늄 농축을 시도하지만 그래도 북한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다. 2006년 10월 첫 핵실험을 강행했던 북한은 2007년 이후 2년째 동결된 핵시설을 재가동한 데 더하여 2009년 5월 25일에 1차 때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평화적 핵 이용’이라는 기둥 하나가 이들 나라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셈이다.

지난 20년간 머리맡을 지켜온 북핵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한국은 누구보다 세계의 비핵화 운동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처지에 있다. 군축과 비확산, 그리고 평화적 핵 이용은 모두가 바람직한 목표이지만 그들 간에는 이율배반적인 관계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기존의 핵보유국이 핵무기를 감축하면 핵무기 가치가 급상승하여 핵 확산의 유혹이 커질 수 있다. 세계의 관심이 핵군축에 쏠리는 동안 핵 확산에 대한 대처가 소홀해질 수 있다.

또한 핵 확산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한국은 발전량의 40%를 원자력에 의존하는 나라로서 핵연료 조달 및 사용 후 핵연료 처리가 필수이며 이를 위해서는 농축과 재처리를 포함한 핵주기의 완성이 시급하다. 그럼에도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농축과 재처리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 때문에 농축과 재처리가 없는 기형적인 핵주기를 갖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미국의 동의하에 핵주기 완성은 물론 평화적 핵 이용을 만끽한다. 재처리 및 농축시설을 보유하고 있음은 물론 (폭탄급 순도는 아니지만) 50t에 가까운 플루토늄을 갖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요즘 한국사회에는 평화적 핵 이용에서만큼은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평화적 핵주권론’이 다시 거론된다.

우리도 ‘평화적 핵이용’ 준비를

이와 관련해서는 되돌아봐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일부 전문가가 ‘평화적 핵 주권’을 포기하지 말자고 주장했지만 당시 정부는 이를 경청하지 않았고 일부 언론은 이를 핵무장을 주장하는 ‘군사적 핵주권론’인 양 부풀렸다. 요즘 북핵 문제가 악화되면서 한국사회 일각에서는 ‘군사적 핵 주권’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충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한국으로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일본의 접근은 현명했다. 장기적이고 용의주도한 계획과 성공적인 대미 핵외교를 통해 농축과 재처리의 필요성을 정당화해 나갔다. 그러면서도 ‘군사적 핵 주권’은 철저하게 배척했다.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한국은 이제부터라도 평화적 핵 이용권에 대한 장기적인 청사진과 국제 협력 방안을 마련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진지한 연구와 계획을 선행시켜야 한다. 정부의 혜안과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전 외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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