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59>

  • 입력 2009년 3월 29일 17시 36분


[제13장 내부의 적은 누구인가]

그는 나의 동료였고 선배였으며 스승이었고 또한 사랑이었답니다. 망할!

앨리스는 상암지구의 랜드 마크인 '내추럴 빌딩' 130층 꼭대기 인공정원으로 들어서며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리곤 혼자 웃었다. 퇴근 무렵 석범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을 때, "알겠습니다. 성 선배, 지 선배랑 같이 거기로 갈까요?" 라고 물었다. 흔히 '거기'로 통하는 도깨비 빌딩 지하 11층 해장국집 <흙>은 때론 둘 때론 셋 때론 넷, 때론 혼자서도 들러 가뿐하게 한 끼를 때우는 대뇌수사팀의 단골식당이다.

"아니 거기 말고 인공정원으로 와. 성 형사랑 지 형사한텐 말하지 말고. 두 시간 뒤 어때?"

그 두 시간 동안 앨리스는 많은 일을 했다.

첫 10분은 인공정원에 딸린 스카이뷰에서 단둘이 저녁을 먹어야만 하는 이유를 따지느라 흘려보냈다. 지난 번 휴일 근무 때 보안청으로 온다고 했다가 사라진 빚을 갚으려는 걸까. 아니다, 그럴 리 없지. 살인사건을 맡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식사 약속을 취소하는 일 따윈 흔하디 흔한 일이다. 혹시 내게 마음을 열려는 건 아닐까. 무슨 소리! 지난 3년 동안 계속 보안청을 벗어나서 단 둘이 밥 한 끼 먹자고 노래를 불렀지만, 석범은 <흙> 외엔 눈길 한 번 돌린 적이 없다.

그리고 30분 만에 혼자 지내는 원룸으로 갔다. 한 달 전 탐문수사를 위해 인공정원 스카이뷰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녁을 즐기는 손님들은 모두 정장 차림이었다. 가게 입구에는 '격식을 갖추지 않는 분은 입장이 유보될 수도 있습니다'라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었다.

옷장을 열었지만 정장이…… 없었다. 아예 치마 자체가 없었다. 날쌘 범인들을 추격하고 밤을 새워 잠복근무를 하는 데는 이동이 편한 바지가 제격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정장 치마가 필요하다.

수퍼스마트슈트를 구입하고 14분 50초 만에 착용했다. 기분에 따라 천을 찢기도 하고 오려내도 문제가 없는 천연섬유를 선호해왔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수퍼스마트슈트를 입자마자 칩이 자동으로 그녀의 체형을 확인한 후 가장 편한 품과 어울리는 색상으로 재조정되었다. 앨리스는 20세기 중엽 그레이스 캘리가 왕비로 있었던 모나코의 왕족들이 즐기던 정장을 택했다. 언젠가 석범이 20세기 배우 중엔 그레이스 캘리가 가장 기품이 넘친다며, 그녀에게 바친 그리스 시인의 싯귀를 한 자락 읊었던 것이다. '나는 요정을 믿지 않았다 /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 눈동자가 깜빡 어제를 들이 쉬고 깜빡 오늘을 뱉는구나 / 그녀의 모든 짓 꽃으로 필 때'

그 앞에서 오늘 밤만은 꽃으로 피어보고 싶었다. 45분 동안 샤워를 마치고 화장을 했다. 화장대에 앉은 적이 언제였던가. 2046년, 보안청 형사로 배속된 후론 10초 이상 거울을 쳐다본 적이 없었다. 허겁지겁 차를 몰고 내추럴 빌딩에 닿으니 석범과 약속한 두 시간이 꽉 찼다.

입구에서 이름을 밝혔다. 웨이터가 조용히 창가 독실로 안내했다. 방문 앞에서 앨리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옷매무시를 다시 살폈다. 단발머리 아래로 훤히 드러난 어깨가 어색했다. 아무리 여름이지만 에어컨 바람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옷을 입다 만 기분이 들어 부끄러웠다.

"남 형사 왔습니다!"

문을 밀고 들어가며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창밖을 쳐다보던 석범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두 눈에 놀라움이 차올랐다. 그와 동시에 앨리스의 초록눈동자에도 실망의 빛이 어렸다. 눈물까지 고이기 시작했다.

석범은……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두 시간 전 보안청에서 봤던 그 복장 그대로, 갈색 면바지에 푸른 돛이 앞가슴에 그려진 여름용 흰 티셔츠가 전부였다. 석범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고 말했다.

"남 형사! ……오늘 무슨 날이야?"

앨리스가 급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곧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석범을 향한 후 답했다.

"오늘요? 오늘 제 생일이랍니다. 모르셨어요?"

앨리스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 태어난 겨울처녀였다. 그러나 이 위기를 넘어가기 위해선 여름처녀로의 변신이 필요했다.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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