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용택]지금 당신이 꽃입니다

  • 입력 2009년 3월 27일 19시 45분


땅에 쑥 돋아납니다. 해 뜨면 쑥 잎 끝에 보석 같은 이슬방울이 반짝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자연은 무궁무진무구입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이 가 닿지 못한 무한대지요. 알 수 없습니다. 다 보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지요.

아침에 본 쑥이 해질 때 보면 더 자라나 있습니다. 쑥은 봄기운을 가장 빨리 알아차린 풀입니다. 봄에 돋아나는 것이 어디 쑥뿐이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풀이 돋아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작은 풀꽃이 피어납니다.

땅에 납작 엎드린 시루나물 꽃은 진보라색입니다. 마치 시루떡같이 꽃이 차곡차곡 피어 있어서 어머니는 이 꽃창초 꽃을 시루나물 꽃이라고 불러줍니다. 이른 봄에 피는 풀꽃 중에 까치꽃이 가장 선명한 꽃 색깔을 갖고 있습니다. 꽃잎 둘레는 남색이고 속은 약간 흰색이지요. 얼른 눈에 띌 때 보면 마치 까치 몸 색깔 같아서 까치꽃이라 했는지 모르지만 이 꽃의 학명은 개불알풀입니다. 키 작은 몸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꽃다지는 얼마나 앙증맞은지요. 냉이 꽃도 눈이 부십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울고 웃는 것 같은 꽃이 어찌 꽃다지나 냉이 꽃뿐이겠습니까. 쭈그리고 앉아 작은 꽃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면 눈물납니다. 정말 눈물이 솟지요. ‘어떻게 그 작은 몸으로 추운 겨울을 이기고 왔니?’ 하고 물어보면 대답이 없어 더 눈물납니다. 조금 있으면 아주 작은 벌레의 나팔 같은 빨간 광대살이 꽃도 핍니다.

눈물나게 하는 작은 풀꽃들

봄에 피는 작은 풀꽃은 추운 겨울 동안 자라나 죽은 듯 색깔을 잃고 지내다가 대지에 봄기운이 돌아오면 자기 색을 찾아내어 꽃을 피워냅니다. 봄에 땅에 달라붙어 피는 꽃은 배고픈 시절 다 나물이었습니다. 그 작은 꽃 중에 내가 좋아하는 꽃은 봄맞이꽃입니다. 봄맞이꽃, 이름도 좋지요. 봄맞이꽃은 실같이 가는 꽃대가 올라와 끝에 흰 꽃잎 넉 장을 활짝 펼쳐 줍니다. 봄맞이꽃은 희고 눈부셔서 햇살 좋은 한낮에는 잘 보이지 않지요. 봄맞이꽃을 보고 걷다가 뒤돌아다보면 몇 송이가 새로 피어나 있습니다. 되돌아가 주저앉아 하나 둘 셋 넷 꽃잎을 세어 줍니다. 작고 예뻐서, 너무나 눈이 부셔서 오래 바라보면 온몸이 시려옵니다.

봄에 핀 작은 풀꽃은 그렇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흔적 같지요. 이른 봄 길, 나는 꽃을 따라다니며 이 작은 생명들 곁에 엎드려 시를 썼습니다. 아니, 내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이 꽃들이 나를 불러 내게 이렇게 저렇게 시를 쓰라 일러주었지요. 나는 다만 그들의 말을 받아 적었을 뿐입니다. 봄이 되면 사람들이 눈을 들어 먼 산의 화려한 꽃을 찾는 동안 나는 이 작은 꽃들 앞에 절하듯 엎드립니다.

이 세상에 봄이 와서 풀과 나무에 꽃이 피듯이 당신 속에도 꽃이 숨어 있습니다. 아니, 꽃 속에 당신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믿는 그 생각으로는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합니다. 그 생각은 꽃이 되지 못합니다. 진 짐 부리고 불끈 쥔 주먹 펴세요. 세상의 모든 것을 벗어던질 광기가 그대 속에도 숨어 있습니다. 그 광기가 저렇게 달디 단 꽃이 되지요.

꽃 보면 어지럽지요.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지요. 꽃은 사랑을 찾아가는 세상의 입술입니다. 입 맞추세요. 꽃은 그대 마음속에 거짓과 허위와 턱없는 허울과 가식을 태우는 불꽃입니다. 그대 마음에 불 지르세요. 꽃같이 아름다운 파멸은 세상에 없지요. 얼마나 많은 것이 소용돌이를 치다가 참지 못해 터지면 저렇게 붉게, 저렇게나 희게, 저렇게나 연분홍으로 피었다 지며 봄바람에 미쳐 저렇게 허공으로 흩어지겠습니까. 못 막지요. 못 참습니다.

가슴속의 꽃을 피워보세요

꽃은 우주의 생존 본능, 새로운 생명의 폭발이지요. 그 어떤 이성과 논리가 저 아름다운 자연의 전쟁을 말린답니까? 전쟁터에 뛰어드세요. 흥분의 도가니지요. 환희와 희열, 가식과 억압으로부터 터지는 봇물처럼 미어지는 자유의 환호가 꽃입니다. 세상의 끈을 놓아버리는 아름다운 손, 몸과 마음을 풀어 흩뿌리는 완전한 해방, 그 광기가, 그 끝, 그 세상의 끝이 꽃입니다. 이승도 저승도 없는 사랑의 완결, 사랑의 일치를 향한 찬란한 죽음이 꽃이지요. 꽃 아니 인생, 꽃 없는 인생 없습니다. 천지간에 꽃이 저리 난리를 치는데 당신은 지금 어느 골짜기를 캄캄하게 헤매시나요. 당신은, 당신이 지금 꽃입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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