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39>

  • 입력 2009년 3월 1일 13시 57분


제3부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

제9장 우는 발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라. 놓친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자이크를 만들고 되물어라. 이게 뭐지? 어디서 이딴 게 굴러들어왔지?

은석범이 '바디 바자르(BoDy BaZaar)'로 들어선 것은 저녁 9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앨리스도 없이 혼자였다.

클럽은 만원이었다. 시끄럽게 반복되는 비트에 맞춰 천연몸과 기계몸들이 뒤엉켜 출렁거렸다. 공연이 방금 끝난 듯 웨이터 두 사람이 무대를 치우느라 바빴다.

석범은 먼저 소꼬리와 개꼬리가 머물렀던 자리를 중심으로 객석을 훑었다. 반인반수족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생맥주를 시켜 들고 원숭이꼬리와 말꼬리가 사라졌던 출구 쪽으로 걸었다. 입구는 붐볐지만 출구는 한산했다.

거기, 얼굴을 가리고 앞가슴까지 흘러내린 긴 머리 여인이 비스듬히 벽에 기대섰다. 핑크빛 탱크탑에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허리에는 오렌지색 야광 머플러를 둘렀다. 모두 리듬을 탔지만 그녀는 움직임이 없었다. 가느다란 담배를 꺼내 물며 턱을 쳐들었다. 몰입과 자만과 도취 같은 단어가 어울리는 자세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찾던 물건을 발견한 사람처럼 석범에게 나아왔다.

"오랜만이에요!"

석범은 저도 모르게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날 압니까?"

그녀의 흩날린 머리카락이 석범의 가슴에 닿았다. 짙고 큰 눈 아래 두툼한 입술이 붉디 붉었다.

"섭섭한데요. 그러고도 검사님 맞으신가?"

'검사님' 세 글자가 석범의 귀에 박혔다. 램프가 켜지듯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혹시…… 노, 민선씨?"

민선이 대답 대신 흘러내린 머릿결을 양손으로 갈랐다. 짙은 마스카라에 오뚝한 콧날이 낯설었다. UFO에서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멍든 얼굴을 가렸던 탓이다.

"의외네요. 범인 잡느라 데이트 할 여유도 없는 분을 사이보그 전용 클럽에서 만날 줄이야…… 혹시 흉악범이라도 쫓아서 이리 오신 건가요?"

"아닙니다. 그냥…… 왔습니다."

"하긴…… 사이보그 거리가 우범지대니까 그쪽이 나타났다고 하여 놀랄 일은 아니겠군요."

"민선 씨는 어떻게 여길……?"

"오핸 마세요. 전 100퍼센트 천연몸이니까. 친구 만나러 왔어요. 이 클럽 베스트 댄서거든요. 방금 끝났는데 못 보셨어요?"

"친구…… 댄서?"

글라슈트 팀원인 민선과 친구인 데다가 사이보그 전용 클럽 댄서라면?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정말 그녀였다. 금붕어 문신이 돋보이는 바디 바자르의 검은 무희.

그녀도 석범을 의식한 듯 입 꼬리로만 미소 지었다.

"그, 그 날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석범이 말을 더듬었다. '바디 바자르'로 향할 때부터 검은 무희를 찾을 작정이었다. 예상한 일인데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라씨, 석범씨! 두 분…… 구면이세요?"

민선이 물었다. 석범과 사라의 시선이 순간 마주쳤다.

"탐문 수사를 왔었습니다."

석범이 대충 둘러댔다.

"맞아요. 그때 뵈었죠."

사라도 그 밤 반인반수족과 맞선 사실을 민선에게 들키기 싫은 눈치였다.

"그랬군요. 사라 씨! 뭣 좀 마실래요? 정말 대단한 스테이지였어요."

"아니에요. 대기실에서 물 한 잔 마셨어요."

"물 가지고 되나요? 내가 살게. 웨이터!"

민선이 생맥주잔을 들고 흔들었지만 눈치 빠르게 달려오는 웨이터는 없었다. 출구 바로 앞에서 미적거리는 손님은 먹을 것 다 먹고 나가기 직전인 경우가 대부분인 탓이다.

"안 되겠네. 바텐더한테 직접 가서 시원한 생맥주 한 잔 가져올게요."

민선이 춤추는 사이보그 사이를 헤치고 갔다.

"고마웠습……."

사라가 정식으로 인사하려는 석범을 가로막았다.

"아뇨. 됐어요. 여긴 왜 또 왔죠?"

차가운 목소리, 질문에 날이 섰다. 석범도 사사로운 감정을 거두었다.

"그날 즉사한 소꼬리의 동료들 혹시 보셨습니까?"

사라가 오른팔을 들어 좌중을 훑었다.

"보시다시피, 돈을 펑펑 잘도 써대던 반인반수족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쪽에서 설치고 다닌 바람에 우리 가게 매상이 얼마나 준 줄 아시나요?"

"그, 그건……."

석범이 대꾸를 하려는데 민선이 생맥주 한 잔을 머리에 이듯 얹고 종종종종 걸어왔다. 사라가 그 잔을 받아서 한 모금 마신 뒤 석범에게 말했다.

"그럼 천천히 즐기다 가세요. 저희 둘은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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