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36>

  • 입력 2009년 2월 24일 13시 34분


노원장의 시선이 근육질 사내에게 향했다.

"변주민 씨죠? 특별시연합 격투대전 웰터급 준우승자! 저도 변 선수 시합을 서너 번 본 적이 있습니다. W 유단자답게 나래차기가 일품이더군요. 이리 나오시죠."

변주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탁자 앞에 섰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노원장에게 다짐을 받듯 물었다.

"석 달만 치료하면 시합 뛸 수 있는 거죠?"

"뛸 수 있고말고요. 격투대전 우승이 소원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치료 예상 기간은 석 달이지만 화를 다스리는 능력이 빠르게 향상되면 두 달 아니 한 달 만에도 치료를 마칠 수 있습니다."

"정말이십니까?"

변주민의 얼굴이 밝아졌다.

"시작하십시오. 왜 앵거 클리닉에 오게 되셨죠?"

변주민이 콧바람을 킁킁 킁킁킁 내뿜었다. 볼테르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변주민의 코가 인공물임을 알아차렸다. 콧구멍 크기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스프링의 미세한 떨림이 감지된 것이다. W에 익숙하도록 글라슈트의 몸을 만들려면 무엇보다도 호흡이 중요했다. 로봇이 무슨 호흡이냐고 힐책할 수도 있지만, 에너지 운용 시스템을 코와 심장과 배꼽을 중심으로 짰다. 열 발산과 균형 유지 장치를 얼굴 중앙에 배치한 것이다. 이 기기가 문제를 일으키면 심장과 배꼽까지 한순간에 마비되었다.

아예 충격흡수용 판까지 심었군. 한겨울에도 코가 막히지 않도록 습도 조절 기능도 곁들였고!

볼테르는 변주민의 어깨와 가슴도 훑었다. 95퍼센트 이상 천연몸이어야만 격투대전 출전이 가능했다.

코를 만졌으니, 더 바꾼 곳은 기껏해야 주먹 하나 정돈가.

"달링3호를 부셨기 때문입니다."

변주민은 말을 멈추고 블로킹을 하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기억하기 싫은 장면들이 떠오르는 듯했다. 달링3호는 싱글 남성을 위한 아내 대용 로봇이다. 피앙세1호나 로맨틱2호도 쓸 만하지만, 달링 시리즈처럼 푸근한 맛은 덜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격투가의 눈물이었다. 뒤돌아서서 감정을 추스른 후 다시 정면을 향했다.

"제 일과는 무척 간단합니다. 새벽 조깅을 마친 후 아침 먹고 타격 훈련 점심 먹고 헬스 저녁 먹고 그라운딩 훈련! 매일 세 군데 훈련장을 돌며 땀을 뺍니다. 녹초가 된 저를 반겨주는 건 달링3호뿐입니다.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결혼을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저처럼 운동에 빠진 사내가 뭐가 좋다고, 따라다니던 여자가 하나 있었거든요. 잠자리는 같이 해도 그녀가 원하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저물 무렵 함께 동네 빵집에 들른다거나 하루에 다섯 번 영상통화를 한다거나 주말이면 가까운 공원에 나들이를 간다거나 하는 일 따위 말이죠. 뛰고 치고 구르기에도 하루 24시간이 빠듯합니다. 정말, 달링3호면 충분하다 여겼습니다. 달링3호는 단 한 마디 잔소리도 없이 저를 믿어줬습니다. 그 말만 안 했어도, 그 말만 안 했어도……."

노원장이 말꼬리를 잡아챘다.

"그 말이 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이긴 후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헌데 시합에서 완패하고 만신창이로 돌아온 밤에도 달링3호는 '오늘 시합 정말 잘 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인사하는 겁니다. 처음 한두 번은 참고 넘겼죠. 헌데 세 번째 똑같은 인사를 받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더라고요. '잘 하긴 뭘 잘해!' 소리를 빽 지르고 3-4분이 지난 후 보니, 달링3호는 제 주먹질과 발길질에 회생불능 상태였습니다. 한 마디로 늘씬하게 얻어맞은 겁니다. 닷새 전에도 시합에서 크게 졌거든요. 그리고 아홉 번째로 구입한 달링3호를 부셨습니다."

"그 날도 달링3호가 '오늘 시합 정말 잘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인사했나요?"

"아닙니다. 미리 손을 썼죠.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했더니 달링3호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헌데 말입니다. 인사말을 안 들으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불쾌한 겁니다. 속에 꿍 하니 뭔가 담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또 소리를 빽 질렀습니다. '닥치라고 정말 닥치는 거야?' 그 뒤는 잘 아실 겁니다. 5년 전 신설된 <로봇 파손죄>에 걸려 앵거 클리닉으로 왔습니다. 치료를 받지 않으면 시합을 못 뛰는 건 물론이고 달링3호를 다시 구입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선생님, 제발! 저는 여자 없인 살아도 달링3호 없인 하루도 못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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