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양섭]그린스펀과 청문회

  • 입력 2008년 10월 8일 02시 49분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의회 청문회에 선다.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금융위기와 관련해서다.

그린스펀이 누구인가. 18년 6개월간 FRB 의장으로 통화정책을 주무르며 세 명의 대통령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해온 경제 대통령이 아니던가.

그가 애매하게 표현한 짧은 문장 속에 숨은 의미를 찾느라 세계 금융계가 촉각을 곤두세운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그의 서류가방 두께로 경제상황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고도 했다. 2000년대 초 닷컴의 거품이 꺼져가자 경제를 살리기 위해 그는 과감히 금리를 낮췄다. 미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 성장의 일등공신으로 칭송되던 정책수단이었다. 그게 바로 요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돈을 싸게 빌릴 수 있게 함으로써 월가는 물론 일반 국민의 탐욕을 부추겨 오늘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게 그를 비판하는 측의 주장이다. 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자본주의의 근간인 시장(市場)의 기능에도 의문이 제기됐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현 금융위기 사태에 대해 근 30년간 미국을 이끌어온 레이거니즘의 종언이라고 진단한다. 즉 감세와 탈규제로 대표되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의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의 일각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논란 끝에 미국 정부와 의회는 결국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 금융자산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장에 개입하기로 했다. 이제 미국식 모델은 미지의 항로를 가게 됐다. 정부와 의회, 전문가들은 더듬어가면서 길을 찾아갈 것이다. 그린스펀을 불러내는 청문회도 그런 노력의 하나일 것이다. 청문회에는 그린스펀뿐 아니라 투자의 귀재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대표, 존 스노 전 재무장관, 무디스 S&P 등 신용평가기관의 대표도 나온다. 금융위기의 원인과 관련해 관련 당사자들의 말을 들어보며 총체적인 그림을 그린 뒤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찾아보자는 목적일 것이다.

미국은 위기상황이나 논란이 심한 사안에 대해 청문회나 위원회를 통해 해법을 모색해 왔다. 1980년대 이란-콘트라 사건도 그중 하나. 레이건 행정부가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반군 콘트라를 지원한 스캔들이다. 올리버 노스 중령을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하다. 청문회가 열렸고 레이건 대통령은 몇 차례 TV를 통해 사과했다. 이 문제를 다룬 타워위원회는 국가안보보좌관의 역할을 강화토록 제안했고, 그렇게 됐다. 최근의 베이커-헤밀턴위원회를 보자. 위원회는 2006년 8개월간에 걸쳐 이라크의 현재 상황과 이라크전쟁 등을 면밀히 조사한 끝에 이라크에서 단계적인 철군을 제안했다. 이라크전을 주도했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미 의회는 청문회라는 제도를 통해 잘못을 가려내고 ‘실패학’ 교과서를 만들고, 나아가 대안도 만들어 왔다. 지금은 빛이 다소 바랬지만 미국이 여전히 세계 초강대국으로 행세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런 복원의 시스템 때문일 것이다. 설사 궤도에서 벗어나더라도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검토하며 다시 길을 찾아내는 그 힘, 그것이 오늘의 미국을 가능케 한 요인 중 하나다. 요즘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국회도 정쟁보다는 해법을 찾아내는 국정감사를 하기를 기대해 본다.

윤양섭 국제부장 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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