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8년 8월 20일 02시 59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승리를 위해 처절한 훈련을 감내한 선수들은 페어플레이를 펼친 뒤 결과엔 깨끗이 승복한다. 그러나 타협과 절충을 추구해야 할 정치인들은 오히려 되도 않을 ‘완승’에만 집착한다. 그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엔 ‘네 탓’만 있을 뿐 ‘내 탓’이란 없다.
정권이 바뀌고, 국회가 물갈이됐건만 정치는 그 모양 그대로다. 갈등과 대립, 파행의 행태는 도무지 나아진 게 없다.
국민이 보기에 정치가 지겨운 이유의 하나는 경쟁적으로 선명함을 강조하려는 풍토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청색, 적색, 흰색, 검은색 등의 강렬한 원색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게 한국 정치다. 정부 수립 60년이 지나도록 정치는 좌우 이념 대립과 흑백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 더해 세인의 주목을 끌려는 정치인들의 튀는 행동, 자극적인 언사가 질 낮은 ‘원색 정치’를 더욱 심화시킨다. 여야의 ‘원색적인 비난’은 한국 정치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상투적인 표현(clich´e)이다.
원색은 눈길을 끌지만 피로감을 쉽게 준다. 시각적 편안함으로 치자면 파스텔 톤이나 중간색이 훨씬 낫다는 건 누구나 경험으로 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합리적인 온건파들이 설 자리를 잃고, 비타협적인 강경파들이 힘겨루기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정치 혐오증만 확산시킬 뿐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중간색을 넓혀가는 게 그리 어려운가. 한나라당과 민주당만 보면 의원들의 정체성이 당별로 꼭 같은 색깔은 아니다. 보수와 진보가 한 지붕 아래 동거하고, 구성원들 간 스펙트럼의 폭이 넓은 것은 여야가 마찬가지다. 당적이 바뀌어 적응을 못한다는 정치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여야는 원 구성에 뒤늦게 합의할 때까지 싸움질만 했다. 14대 국회가 1992년 개원식 후 4개월 만에 원 구성을 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놀고먹는 국회는 정말이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안타까운 건 국회와 여야 지도부가 비교적 온건파로 채워졌는데도 상생정치가 실종된 점이다. 차제에 국정을 주도하기 위해선 완전히 밀어붙여야 한다든가, 혹은 한번 밀리면 끝장이라는 여야 내부의 투쟁 논리에 밀려 국회는 마냥 표류했다. 이 과정에서 여야 원내대표들이 어렵사리 잠정 합의를 해도 협상에 참여하지 않은 양측 강경파들이 뒤집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중도(中道)’가 금기시되고, 협상파가 ‘사쿠라’로 몰리기 일쑤였던 낡은 정치의 잔재가 새 정치를 펴야 할 18대 국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선 안 될 것이다.
여야의 이번 합의를 보면 그만한 일로 그렇게 오래 직무유기를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도 세비는 꼬박꼬박 타갔다. ‘정치는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먹고사는 데 지친 국민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간 뺨을 맞을지도 모른다. 국민이 바라는 건 원색적인 정치 쇼가 아니라 민생을 최우선시하는 차분한 정치다. 싸움 잘하고 목소리 큰 의원 대신 조용히 일 잘하는 의원을 보고 싶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