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국민의 대표’ 맞나

  • 입력 2008년 8월 20일 02시 59분


‘국가 대표’와 ‘국민의 대표’가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벅찬 감동과 환희를 안겨준 한국 선수들과 여의도에서 무위도식하는 국회의원들을 두고 하는 얘기다. 국민을 위해 선수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생각하면 19일 18대 국회 원 구성 합의 때까지 국민의 대표라는 의원들이 보인 행태는 정말 꼴불견이다.

승리를 위해 처절한 훈련을 감내한 선수들은 페어플레이를 펼친 뒤 결과엔 깨끗이 승복한다. 그러나 타협과 절충을 추구해야 할 정치인들은 오히려 되도 않을 ‘완승’에만 집착한다. 그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엔 ‘네 탓’만 있을 뿐 ‘내 탓’이란 없다.

정권이 바뀌고, 국회가 물갈이됐건만 정치는 그 모양 그대로다. 갈등과 대립, 파행의 행태는 도무지 나아진 게 없다.

국민이 보기에 정치가 지겨운 이유의 하나는 경쟁적으로 선명함을 강조하려는 풍토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청색, 적색, 흰색, 검은색 등의 강렬한 원색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게 한국 정치다. 정부 수립 60년이 지나도록 정치는 좌우 이념 대립과 흑백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 더해 세인의 주목을 끌려는 정치인들의 튀는 행동, 자극적인 언사가 질 낮은 ‘원색 정치’를 더욱 심화시킨다. 여야의 ‘원색적인 비난’은 한국 정치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상투적인 표현(clich´e)이다.

원색은 눈길을 끌지만 피로감을 쉽게 준다. 시각적 편안함으로 치자면 파스텔 톤이나 중간색이 훨씬 낫다는 건 누구나 경험으로 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합리적인 온건파들이 설 자리를 잃고, 비타협적인 강경파들이 힘겨루기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정치 혐오증만 확산시킬 뿐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중간색을 넓혀가는 게 그리 어려운가. 한나라당과 민주당만 보면 의원들의 정체성이 당별로 꼭 같은 색깔은 아니다. 보수와 진보가 한 지붕 아래 동거하고, 구성원들 간 스펙트럼의 폭이 넓은 것은 여야가 마찬가지다. 당적이 바뀌어 적응을 못한다는 정치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여야는 원 구성에 뒤늦게 합의할 때까지 싸움질만 했다. 14대 국회가 1992년 개원식 후 4개월 만에 원 구성을 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놀고먹는 국회는 정말이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안타까운 건 국회와 여야 지도부가 비교적 온건파로 채워졌는데도 상생정치가 실종된 점이다. 차제에 국정을 주도하기 위해선 완전히 밀어붙여야 한다든가, 혹은 한번 밀리면 끝장이라는 여야 내부의 투쟁 논리에 밀려 국회는 마냥 표류했다. 이 과정에서 여야 원내대표들이 어렵사리 잠정 합의를 해도 협상에 참여하지 않은 양측 강경파들이 뒤집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중도(中道)’가 금기시되고, 협상파가 ‘사쿠라’로 몰리기 일쑤였던 낡은 정치의 잔재가 새 정치를 펴야 할 18대 국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선 안 될 것이다.

여야의 이번 합의를 보면 그만한 일로 그렇게 오래 직무유기를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도 세비는 꼬박꼬박 타갔다. ‘정치는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먹고사는 데 지친 국민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간 뺨을 맞을지도 모른다. 국민이 바라는 건 원색적인 정치 쇼가 아니라 민생을 최우선시하는 차분한 정치다. 싸움 잘하고 목소리 큰 의원 대신 조용히 일 잘하는 의원을 보고 싶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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