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40대 旗手論, 그 후 40년

  • 입력 2008년 6월 19일 02시 57분


극우 언론인인 조갑제 씨가 그제 자기 홈페이지에 ‘박희태, 정몽준은 한나라당 대표가 될 수 없다!’는 글을 올렸다. 비슷한 주제의 칼럼을 준비하다 눈에 띈 글이다. “대통령은 현대건설 회장 출신, 당 대표는 현대중공업 오너, 친북세력은 ‘현대가(現代家)가 대한민국을 통치한다’고 공격할 것이다”라는 부제(副題)가 말해주듯 조 씨 특유의 냉전적 사고가 넘쳐난다. 읽기가 거북한 사람도 있겠지만 결론만큼은 경청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7월 3일, 10년 만의 정권 교체 이후 처음 열리는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미 축제의 장이 아니다. 지금 상태로만 보면 이명박 대통령은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대국민담화를 발표한다지만 혼자 힘으로는 소생(蘇生)하기 어렵다. 그런 마당에 박 전 국회부의장, 정 최고위원이 당 대표로 거론된다는 사실 자체가 한나라당의 역사의식 부재(不在), 국가관 부재를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조선일보 김민철 기자가 2004년 5월 ‘민주당 9년 출입하다 한나라당 가보니’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김 기자는 원희룡 의원의 입을 빌려 “큰 변화를 위한 노력과 자기희생이 절실한데 중진들 사이에서는 징그러울 정도로 ‘귀차니즘’이 팽배하다”고 한나라당의 모습을 그렸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영남 출신 중진들이 여유롭고 흐뭇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다니는 모습”이라는 체험담도 덧붙였다. 천막 당사 때의 얘기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박 전 부의장도 떠올리며 썼을 것이다. 박 전 부의장은 어느 인터뷰에서 “국민의 쓴소리도 가감 없이 청와대에 전하는 ‘꼿꼿 대표’가 되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회의가 든다. 정 최고위원 역시 굳이 조 씨의 글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강부자 내각’을 무색하게 한다. 게다가 2002년 대선 때의 행적도 아직 검증받지 않았다.

두 사람이 유력 대표후보가 된 건 ‘공천 학살’ 때문에 쓸 만한 사람이 모두 나가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분석은 아니다. 그 정도 공천은 늘 있었다. 정작 답답한 건 이들은 물론 ‘뉴 리더’의 잠재주자로 꼽히는 인물들조차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권이 위기일수록 전당대회는 새로운 스타 탄생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돼야 한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가 그랬다. 그 전해인 1969년 42세의 김영삼(YS) 원내총무는 “빈사(瀕死) 상태의 민주주의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결의와 각오가 필요하다”며 40대 기수(旗手)를 자임했다. 그때 YS가 스스로에게 다짐한 말이 깊은 의무감, 굳은 결단, 벅찬 희생이다. 65세의 유진산 당수가 “구상유취(口尙乳臭), 아직 입에서 젖비린내 나는 것들이…”라고 무시했지만 전당대회는 결국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이라는 뉴 리더들의 탄생신화를 쓰게 된다.

지금 한나라당은 어떤가. 그나마 국민적 인지도가 있는 당의 ‘핵심 자산’들조차 새로운 기수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나 노리고 있다.

24일부터 후보 등록이다. 시간이 없다. 선수들이 파이팅을 보여주지 못하면 관중이 나서야 한다. 당원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39년 전의 김영삼, 김대중 같은 뉴 프런티어의 기수”라고 압박해야 한다.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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