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누가 외환은행의 ‘좋은 주인’인가

  • 입력 2008년 6월 6일 02시 53분


국보급 고려청자가 있다. 사정이 급박해 이를 한 소년에게 보관하게 했다. 문제가 발생했다. 맡길 때는 침착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장난꾸러기였다. 청자를 소년에게 계속 맡겨둬야 할까, 아니면 믿을 만한 금고에 옮길까.

이런 비유를 든 것은 지연되고 있는 외환은행 매각 때문이다. 이 은행의 대주주는 론스타다. 론스타는 미국 텍사스 주에 기반을 두고 부동산이나 구조조정 투자를 해 온, 투기성 높은 사모펀드다. 주기(州旗)에 별 하나만 외로이 그려져 있는 텍사스 주는 론스타(Lone Star)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데, 이를 회사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2003∼2004년 외환은행과 외환카드가 론스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채무비율 및 주가가 조작된 혐의가 포착돼 현재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 와중에 론스타는 은행 매각에 나서 지난해 9월 HSBC에 외환은행 보유지분 전량(51.02%)을 파는 계약을 했다. HSBC는 자기자본 세계 1위, 자산 규모 2위의 은행으로 국제적 공신력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계약이 이행되려면 우리 금융당국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얻지 못하고 있다. “승인 여부는 법적 불확실성을 해소한 후 처리하겠다. 법원의 최종 판결을 지켜보겠다”는 것이 종전 정부의 방침이었다. 현 정부 들어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매각이 너무 지체되는 데 따라 국내 금융산업에 미칠 부작용에 대해서도 면밀히 검토할 것”이라고 말해 변화 조짐이 감지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진척은 없다.

사법당국은 론스타의 범죄 혐의를 제대로 밝히고 책임을 엄정히 물어야 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금융당국이 매각계약의 집행을 막을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론스타가 유죄라면 그런 자본에 은행 경영을 억지로 맡겨둬야 하는가. 반대로 론스타가 무죄라면 승인을 안 해줄 이유가 있는가.

론스타의 유죄가 확정될 경우 외환은행 소유권과 관련해 가능한 가장 강력한 처분은 대주주 자격 박탈이다. 그럴 경우 론스타는 외환은행을 반드시 팔아야 한다. 지금 못 팔게 막을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다. 혹 론스타에 거액의 벌금 부과가 예상된다면 ‘예상벌금액 공탁’ 조건으로 승인하면 될 일이다.

만에 하나 론스타가 정부 등으로부터 외환은행을 산 2003년의 거래 자체를 원인무효화해 ‘외환은행을 다시 국유화하는’ 경우까지 금융당국이 생각하고 있다면 사건 종결 시까지 매각을 불허할 이유가 발생한다. 과연 그게 가능할지에 대한 법적 논란도 복잡하기 짝이 없지만, 그와 별개로 이는 ‘외국인 투자자산 몰수’를 연상케 하는 일이다. ‘한국은 더는 국제 무대에서 정상적인 플레이어로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들릴 수 있다. 동아시아 금융허브가 되겠다면서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사건으로 론스타도 타격을 받았지만 한국은 더 큰 피해를 봤다. 세계경영연구원의 조사 결과 저간의 사정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와 주한유럽상공회의소 회원사의 최고경영자(CEO)들조차 49%가 “론스타가 한국의 반외자 정서에 당하고 있다”며 론스타 편을 들고 있다.

론스타와 HSBC의 계약은 7월 말까지 유효하다. 론스타가 계속 외환은행을 보유토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줄지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됐다.

허승호 경제부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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