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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17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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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에 들어갈 이름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다. 그래도 그렇지, 한 단체를 소개하며 ‘정부의 시녀기관’ 운운한 것은 너무 심한 것 같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이 대목은 대교협이 자체적으로 펴낸 ‘한국대학교육협의회 20년사’를 인용했을 뿐이다.
지금과는 달리 어두웠던 과거
전국 4년제 대학 총학장의 협의체라는 대교협을 만든 건 누구인가. 대학이 아니라 정부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7·30교육개혁조치’를 통해 대학 의사도 수렴치 않고 본고사 폐지, 복수지원 허용을 골자로 하는 급진적인 대입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수험생들의 극심한 눈치작전으로 실패했다. 문교부 대학국장까지 인책 사퇴하면서 교육당국은 정부와 대학을 이어 줄 ‘민간 주도적’ 협력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게 대교협이다.
문교부는 연두업무보고 때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3개월 만에 뚝딱 대교협을 만들어 냈다. 꼭 26년 전인 1982년 4월의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대교협에 ‘자율’을 주지 않았다.
“정부는 이 기관을 통해 대학 행정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또한 정부정책의 지지자 또는 방벽이 되는 기능을 기대했을 것이며, 대학사회는 명실 공히 대학의 이익대변과 권익옹호기관으로서 자율적 의사결정체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다고 할 수 있다.”(‘한국대학교육협의회 20년사’)
정부는 대교협을 이용하려 했고, 대학은 활용하려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결과는 뻔했다. 권위주의 시절, 대교협은 정부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학내 시위가 끊이지 않았던 1980년대 중반, 대교협 취재를 가 보면 정부가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대학정책의 들러리를 설 때가 많았다. 회의에 참석한 석학들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대교협은 이 기간을 에둘러 ‘타율적 자율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런 대교협이 요즘 각광을 받고 있다. 교육부로부터 대입 관리업무를 넘겨받으면서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제2의 교육부’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이번 대입 관리업무도 대교협이 쟁취한 게 아니다. 대학자율화를 공약한 이명박 정부가 교육부로부터 빼앗아 넘겨준 ‘전리품’ 같은 것이다.
대교협의 오늘을 깎아내리자는 게 아니다. 대교협이 대입 업무를 맡은 데 대해 기대 못지않게 우려도 적지 않은 이유를 짚어 봐야 한다는 뜻이다.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대학도 이제 자기 책임하에 대입 업무를 감당할 만큼 성숙했으니, 교육부는 대입 업무에서 손을 떼고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라고 말한다.
걱정하는 쪽은 수험생과 대학 간, 대학과 대학 간의 이해가 얽히고설킨 대입 업무를 대교협이 관리, 조정해 낼 능력이 있느냐고 묻는다. 대교협은 그동안 대입 실무, 대학평가, 연구조사 등을 통해 역량을 쌓아 왔고, 입법이나 건의 활동 등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출범 당시 97개였던 회원 대학도 198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해 본 적이 없다. 정책결정이다. 당연히 책임질 일도 없었다.
이제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그러나 이제 그런 논쟁은 무의미하다. 교육부 말고 대입 업무를 맡을 수 있는 곳은 대교협뿐이고, 업무 이관을 위한 법 개정도 시작됐다. 그러니 앞으로 대교협 스스로가 정부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 시작한 이상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육은 조금이라도 전진할 수 있다.
대교협의 역할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대입 업무를 맡을 수 있을 때까지 중간 계투요원으로 전력투구하면 된다. 정부는 입시 업무를 대학에 넘기는 시기를 2012년 이후로 생각하고 있지만 대교협의 역량에 따라 앞당겨질 수도 있다.
대교협은 이제 코치에서 프로선수로 신분이 바뀌었다. 프로는 말이 아니라 성적으로 평가받는다. 위상이 조금 올라갔다고 으스댈 때가 아니다. 대교협, 이제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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