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

  • 입력 2008년 2월 29일 02시 56분


음악은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요, 국경을 초월하는 메시지다. 멋진 선율을 듣는 순간 모든 이의 마음에 같은 감동이 몰려오기 때문일까.

아니다. 실상은 반대일지도 모른다. 음악이 주는 메시지란 오히려 뜬구름처럼 모호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에 닿는 접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비로소 공유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936년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위기에 처했다.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가 자신의 신작 오페라를 ‘형식주의적’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대응은 민첩했다. 이듬해 쇼스타코비치는 신작인 교향곡 5번을 무대에 올렸다. 프로그램에는 ‘정당한 비판에 대한 작곡가의 응답’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강렬한 금관 합주와 타악기의 연타로 전곡이 끝나자 관객들은 열광했다. 관영 매체는 이 작품을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와 연관 지어 해석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가 죽고 소련이 붕괴한 뒤 그와 친했던 음악가들은 쇼스타코비치가 이 작품에 대해 은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금관 합주와 타악기가 사회주의 승리를 그렸다고? 잘 들어보라. 등 뒤에 단검을 대고 ‘웃어라, 환호하라’며 협박하는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가 문서로 증언을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은 명확하지 않다.

음악작품뿐 아니다. 음악을 매개로 하는 행사의 의미도 베푸는 쪽과 즐기는 쪽이 항상 같지는 않다. 독일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회고록 ‘나의 생애’(번역판 제목: 사로잡힌 영혼·빗살무늬 출간)에는 ‘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이라는 장(章)이 나온다. 낭만적인 소제목과 달리 이 장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의 음악 활동을 묘사하고 있다.

전염병과 기아가 만연했던 게토에서 독일군은 놀랍게도 오케스트라 활동을 허용했다. 현악기 활을 들면 (손이 떨려) 저절로 떨림음이 연주될 정도의 여건이었지만 게토의 유대인들은 열성적으로 연주회를 찾았다.

때로 나치 장교들이 들이닥쳤지만 평소 포악한 모습과 달리 점잖게 연주를 감상하다 나갔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인도적’인 유대인 정책을 선전하려는 것이었을까. 그러나 기아와 질병 외에 ‘미래의 상실’에도 힘겨워했던 바르샤바 유대인들에게 이는 “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 넘치게 먹여다오(셰익스피어 ‘십이야’)”라는 말을 연상시키는 축복이었다.

엄숙한 표정으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던 북한 청중의 얼굴이 새삼 떠오른다. 자유분방한 ‘파리의 아메리카인’이나 ‘캔디드 서곡’을 들으며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취재진 앞에서 ‘음악이 아름다웠다’던 미소 띤 얼굴들 위로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 씨의 모습도 겹쳐진다. 평양에서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재즈곡을 연주했다는 이유로 경위서를 10장이나 썼다는 그는 2002년 결국 남쪽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감춰진 속마음이 무엇이든 괜찮다. 원래 음악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평양의 관리들은 미국의 화음이 평양 시민들의 마음에 불러일으킬 ‘바람’이 미국을 향한 우호의 제스처로 얻을 이득에 비해 무시할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손해를 본 쪽은 없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맞춰 수많은 얼굴을 보여 온 음악은 이번에도 누구나 만족할 만한 결과를 베풀어 주었을 것이다.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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