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칼럼]영어, 한국의 현실과 성공한 나라

  • 입력 2008년 2월 18일 02시 59분


학교 교육만 받고도 국민 누구나가 생활영어쯤은 할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에서 고등학교에서도 영어 교육은 영어로 하고 이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야심 찬 발안과 그 안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을 보니 영 입맛이 씁쓸해진다. 교육에 관한 좋은 의도가 타당성이 약한 방법론과 성급하게 결부되면서 명분마저 잃고 심각한 부작용만 낳곤 하던 지금까지의 악순환이 교육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기본적으로 바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재임 기간에도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영어 교육 강화의 필요성은 국민이 먼저 느끼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어디고, 교사가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이 과연 교육 효과나 경제적 비용 면에서 가장 타당성이 높은 방법인가 하는 데 있다.

아무리 영어 몰입 교육이 필요하다 해도 그것이 우리말에 대한 긍지나 교육을 손상시키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될 염려가 있다. 문화나 민족 정체성의 근간이 모국어일 뿐 아니라 자기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 남의 말을 고급스럽게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문법-읽기-쓰기는 제대로 했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른바 원어민 교육이나 현지 연수가 외국어 교육에 필수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영어교육은 영어로 해야 한다는 인수위 측의 발상도 바로 그 연장선에서 나온 듯싶다. 그리고 사람들은 흔히 영어교육이 잘못된 것은 문법이나 읽기, 쓰기에만 치중하고 회화를 등한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 중고교 6년간 영어를 배우고도 입도 뻥긋 못하는 잘못된 영어 교육의 피해는 영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외국어는 아주 어렵다는 편견을 심어 줘 외국어라면 아예 주눅이 들게 만드는 것이 더 큰 피해일지도 모른다. 이런 공교육에 대한 강한 반작용으로 조기 회화 교육이 주창되고, 어머니가 파출부를 해서라도 자녀는 해외 연수를 보내는 사회 풍조가 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영어 교육에서 회화는 안 되도 문법 교육과 읽기, 쓰기는 제대로 했다는 이야기인가? 문맥을 이해하고 어휘를 익히려는 학생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 없이도 원어민들과 자주 접촉만 하면 고급 영어가 저절로 되는 것인가. 더구나 발음도 그리 좋지 않고 자유자재로 문장을 구사할 능력도 부족한 한국인 교사들이 단기 연수 후 자신감도 없이 서투른 영어로 가르칠 때 그것이 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며 학습 의욕을 북돋아 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영어를 공부하던 시절 영어를 들을 기회라고는 AFKN이라는 미군 방송뿐이었고 회화가 가능한 교사는 거의 없었다. 자비 어학연수는 꿈도 못 꾸고 어디고 장학금 준다는 대학으로 유학을 가야 했던 우리 세대 사람들은 곧바로 학위 과정을 밟는 데 잠을 설쳐야 했다는 것밖에는 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일찍부터 정확한 발음 훈련을 받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언어교육 성패의 관건은 본인의 의욕과 노력이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해 온 나도 영어로 강의를 하려면 아직도 긴장이 되는데 한국인 교사들에게 단기 연수를 거친 후 곧바로 영어로 수업을 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더욱더 깊은 역부족의 늪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동영상교재 활용이 바람직

차라리 그들에게 현지인 전문가들이 만들어 놓은 외국인용 동영상 어학교재들을 입체적으로 활용하며 수업을 진행하는 방법을 훈련시키고 그런 수업에 필요한 자료와 시설들을 전국 학교에 갖추어 주어 교사들도 학생들과 함께 회화 실력을 향상할 기회를 주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길이 아닌가 한다. 국가경쟁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핀란드나 많은 유럽 나라가 활용하는 것도 바로 그런 방법들이다.

비단 영어 교육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성과가 의심스러운 방법론에 성급하게 집착함으로써 정책의 훌륭한 취지까지 훼손하고 국민 부담만 늘리는 일이 되지 않을지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고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호에 몸을 싣는 모든 사람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다.

이인호 전 주핀란드·주러시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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