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상돈]허장성세<虛張聲勢>풍조에 대학 병든다

  • 입력 2007년 10월 1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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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교수 정년보장 심사에서 후보자를 대거 탈락시켜 안일한 우리나라 대학의 풍토에 경종을 울렸다. 서울대 고려대 등도 그 정도는 못 되더라도 교수들의 승진과 정년보장 심사를 엄격하게 하고 있다. 그러자 모든 대학이 교수업적 심사를 엄격히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KAIST 사태가 ‘사치’일 뿐이다. KAIST와 포스텍, 소수의 상위권 대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이 안고 있는 문제는 교수들의 정년보장 심사를 강화하느냐 마느냐 하는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양적 성장에 치중해 온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은 연구와 교육이란 두 토끼를 무리하게 함께 쫓다가 모두를 잃어버릴 수 있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연구와 교육은 대학의 본질적 기능이지만, 대학에 따라 연구에 치중하는 대학도 있고 학부 교육에 치중하는 대학도 있기 마련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州)는 버클리, 로스앤젤레스 같은 UC(University of California) 계열의 명문 주립대 시스템과 학부 중심인 CSU(California State University) 계열의 주립대 시스템을 운영한다. 학부교육 중심인 CSU를 졸업한 우수 학생은 UC에 진학해서 석·박사 과정을 밟을 수 있다. 미국의 사립대 중에는 윌리엄스, 칼턴 등 작지만 강한 학부 중심 대학도 많다.

수입 위해 특수대학원 학위 남발

이에 비해 우리나라 대학은 한결같이 ‘연구 중심의 명문대’를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연구 중심 대학을 지향한다는 많은 대학의 현실은 암울하다. 조기 유학 등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학부 시절부터 외국 대학으로 빠져나가고,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외국으로 대학원 공부를 하러 몰려간 지는 이미 오래됐다. 미국의 웬만한 대학에는 한국 대학원생들이 북적거리고, 우수한 학생들이 떠난 국내 대학원의 빈자리는 후순위 대학 출신들이 차지하게 됐다. 대학원은 원서만 내면 합격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으며, 연구를 하기에 역량이 안 되는 대학원생이 많다 보니 이공계의 경우 교수들의 연구에 장애가 생기기도 한다. 학부생이 부족해 대학의 존립 자체가 걱정되는 지방대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 대학에 특히 많은 이른바 특수대학원도 문제를 안고 있다.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직장인들이 저녁에 다니는 특수대학원은 수료증을 주는 데 그쳐야지 학위를 수여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대학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다양한 특수대학원을 만들어 학위를 수여함으로써 학위의 품위를 떨어뜨렸다. 웬만한 대학엔 특수대학원이 10개나 되니, 의학 법학 경영 대학원과 1, 2개 전문대학원만 있는 하버드 등 미국 명문대와 비교된다. 하지만 이제는 특수대학원도 원생을 모집하기가 쉽지 않으니, 과욕과 허영의 종말이 닥쳐 오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대학의 책임이 제일 크지만, 정부도 적잖은 역할을 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연구 중심 대학, 특성화 대학 등 각종 명목을 내세우고 지원금을 배분하자 대학들은 그런 ‘당근’을 차지하기 위해 새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심지어 별도의 대학원을 설립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깊이 있는 학문적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어설픈 대학원 중심 풍조 때문에 대학 재정의 대부분을 감당하는 학부생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적자 날 로스쿨에 사활 건 유치전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의학 법학 등 전문대학원 제도도 대학에 또 다른 함정으로 작용하고 있다. 의학전문대학원 설립 시에도 겪은 일이지만, 전문대학원 설치 요건은 우리 여건으로 볼 때 무리한 면이 많다. 2009년에 개교할 예정인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만 해도 비현실적인 설치 기준 때문에 신청하는 대학은 올해부터 연간 수십억 원의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남이 하면 나도 한다’는 식으로 많은 대학이 사활을 걸고 신청 대열에 뛰어들고 있다. 이런 풍조가 대학을 병들게 했음에도 똑같은 행태가 반복되는 것이다. 대학들이 허장성세(虛張聲勢)의 덫에 빠져 있는 사이에 우수한 학생들의 엑소더스가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요즘 우리의 사정이다.

이상돈 중앙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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