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별]‘파페포포’작가 심승현의 ‘이해인 수녀님’

  • 입력 2007년 10월 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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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파페포포’의 작가 심승현 씨가 그린 이해인 수녀(가운데)의 모습.
만화 ‘파페포포’의 작가 심승현 씨가 그린 이해인 수녀(가운데)의 모습.
심승현 씨
심승현 씨
《중학교 3학년 때 야뇨증에 걸린 적이 있었다. 사춘기였던 나는 네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추억, 이성에 대한 호기심, 미래에 대한 회의 등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 나에게 유일한 위안이자 도피처는 시 쓰기였다. 불안감에 마음이 어두워질 때면 시에 매달렸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시작(詩作)은 계속됐다. 공부를 위한 연습장에는 습작 상태의 시와 그림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하루 평균 10여 편의 시를 쓰면서 더 멋진 표현과 구성을 위해 머리를 짜내고 또 짜냈다. 그 무렵 만났던 이해인 수녀님의 시는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떻게든 화려하고 멋지게 치장하려고 했던 나의 시에 비해 소박하고 순수한 수녀님의 시는 새로운 경지로 다가왔다.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말들이 알알이 맺혀 더 큰 울림과 감동으로 다가왔던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나도 물 흐르듯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으나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뒷날 ‘파페포포’를 만들 때 수녀님이 주신 영감은 큰 자산이 됐다. 》

수녀님을 실제로 만난 건 2003년 12월 결혼하기 전 가을이었다. 출판사에 다니는 아내가 수녀님의 책을 편집하는 등 인연이 깊어 결혼 전 인사를 드릴 겸 식사 자리를 가졌다. 고교 때 큰 영감을 주었던 수녀님을 직접 만난다고 하니 나는 잔뜩 긴장했다. 숫기가 없고 소심한 A형인 나는 낯선 사람을 만날 때 일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수녀님의 인상은 참 편안하고 친절했다. 때로 수줍은 소녀 같은 모습도 있었고 천진한 아이 같은 모습도 갖고 계셨다. 우리 부부를 친근하게 대하시는 모습에선 어머니 같은 푸근함이 있었다. 나의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수녀님은 우리 부부에게 행복하게 살라는 말씀과 더불어 많은 덕담을 해 주셨다. 헤어질 때는 정성스럽게 그림도 그려 주신 뒤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셨다. 사인엽서와 책갈피였다.

“별거 아니지만 가져가.”

뒤늦게 알았지만 수녀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자그마한 선물을 주기 위해 늘 선물 보따리를 들고 다니셨다. 그 선물들은 수녀님의 시처럼 소박한 것이었다. 서표, 엽서, 메모지, 조개 껍데기, 양초….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수녀님이 주신 선물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내 마음은 따뜻해지고 입가엔 미소가 흐르게 된다.

아내가 수녀님에게 받은 수없이 많은 작은 선물 중에는 친환경 수세미도 있다. 수녀님이 손수 뜨셨다는 손뜨개 수세미였는데, 주방세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기름때가 잘 닦여 좋다고 하셨다. 환경까지 소중히 여기는 수녀님의 마음이 묻어난 특별한 선물이었다.

결혼 후에도 이따금 수녀님을 뵙거나 연락할 일이 있었고, 수녀님은 늘 친절하게 응대하며 안부를 물으셨다.

지난해 4월 파페포포 시리즈 말고 개인적으로 가장 정성을 들였던 동화책 ‘프라미스’를 출간했다. 파페포포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이야기를 풀어내 어린이 동화처럼 만든 것인데 추천사를 부탁해야 할 시점이 왔다. ‘누가 좋을까’ 하고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내와 내가 둘 다 똑같이 떠올린 사람은 이해인 수녀님이었다.

수녀님은 바쁘신 중에도 기꺼이 내 책을 보시고는 정성스럽고 과분한 추천사를 써 주셨다. ‘진정한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인 것을 이 아름다운 책은 작가의 빼어난 글과 그림으로 섬세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수녀님의 글은 내 의도에 꼭 맞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수녀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있다.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 수녀님을 만났을 때 아직 아기가 없어 고민이라고 말씀드렸다. 수녀님은 예쁜 아기를 원하는 우리의 소망을 아시고는 기도를 해 주신다고 하셨다. 당신의 기도가 신기하게도 잘 들어서 임신에 성공한 부부가 많았다는 말씀과 함께. 말씀만으로도 우리에겐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아내는 얼마 후 임신을 했고 올 3월 드디어 바라던 건강한 아들을 얻었다. 수녀님의 진심 어린 기도, 그 따뜻한 마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도 수녀님은 건강하고 착한 아이가 태어나길 기도해 준다며 따뜻한 목소리로 안부를 전해 주셨고 아이가 태어나자 가장 기쁜 목소리로 축하해 주셨다. 건강한 아이를 갖도록 소망해 주신 기도, 수녀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다.

수녀님의 사인회에 우연히 들른 적이 있었다. 수녀님은 사람마다 일일이 꽃그림과 예쁜 스티커를 책에 붙여 주고 계셨다. 만화가 시각에서 보면 그림을 잘 그리시는 건 아니지만 그 정성만큼은 누구보다 지극한 것이었다. 누구를 대하든 더 친절하지도, 더 소홀하게 대하지도 않으신다. 우리 부부에게 주신 것처럼 모든 이에게 동등한 애정을 주시는 분이라는 걸 느낀다.

누구에게나 편견 없는 마음으로 모든 이에게 똑같이 사랑을 전하는 수녀님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무엇보다 수녀님이 내게 일깨워 주신 삶의 가르침은 ‘내가 해 준 것만큼 돌려받지 못한다고 남을 탓하거나 서운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섭섭하다는 감정은 내가 원하는 만큼 해 주지 않는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줄 수 있는 이상을 준 내게 문제가 있다는 거다.

요즘도 삶이 힘들고 메마를 때, 누군가에 대해 자꾸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 내가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퍽퍽해질 때면, 나는 수녀님의 글을 찾아 읽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성스러운 게 천성이자 직업이지만 내게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한다. 친절도 도가 넘치면 버겁고 부담이 되는 건 물론, 하고 나서도 내가 이렇게 해 주었는데 하는 마음이 생겨 어떤 형태로든 반대급부를 기대하게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고 싶은 만큼만 하자. 그 우러나오는 마음의 폭과 깊이를 키우자….”

심승현 만화가

■“‘별과 어린왕자’ 딱 어울리네요”

“심승현 씨한테는 ‘어린 왕자’ 같은 분위기가 나요. 조용하고 나서지 않지만 자신만의 그윽하고 순수한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해인 수녀는 심 씨가 자신을 ‘내 마음속의 별’로 꼽았다는 얘기를 듣고 ‘별과 어린 왕자’가 딱 어울리는 조합이라며 반가워했다. 이해인 수녀는 오랜 친분이 있던 심 씨의 아내 박경아 씨를 통해 심 씨를 알게 됐지만 시인의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코드’가 맞아서인지 심 씨와도 종종 연락하고 지낸다.

이해인 수녀는 말했다. “제가 심 씨 부부에게 많이 챙겨 줬다고 하지만 그쪽도 저를 많이 챙겨 줍니다. 신간이 나오면 꼭 저한테 부쳐 주고 다이어리 같은 것도 보내 주고…. 서로 위해 주는 마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심 씨 부부는 아기를 낳은 뒤 신간으로 나온 ‘파페포포 안단테’를 이해인 수녀에게 보내면서 심승현 박경아 이름 안에 하트를 그려 넣고 아기 사진과 함께 보냈다.

“언젠가 제가 경아한테 ‘남편과 사이좋게 살고 있느냐’고 묻자 ‘신랑이 예민하고 섬세한 편이라 마음 안 다치게 노력하고 있다’면서 신랑이 아기를 많이 기다리는데 소식이 없어 고민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내가 기도해 줘서 아이를 둘씩 낳은 부부가 있는데 내가 영험 있는 기도를 해 주면 좋은 소식 있을 것”이라고 농담 섞어 말했는데 실제 예쁜 아기가 태어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물론 제 기도 덕분만은 아니겠지만요.”

이해인 수녀는 최근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마음이 쓸쓸하고 허전하던 이해인 수녀는 문득 ‘파페포포 안단테’의 작가 서문에 있는 한 구절이 떠오르더라고 했다.

‘…내게 허락된 삶의 길이는 얼마일까? 오래도록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이 없이 아주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생각을 바꿨다. 내게 허락된 삶은 길이가 아니라 깊이와 넓이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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