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스승’이 있어야 ‘스승의 날’도 있다

  • 입력 2007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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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지방의 한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자식의 학년이 바뀌면 꼭 담임선생님을 찾아뵙는 친구 어머니가 계셨다. 가실 땐 뭔가 챙겨 가셨다. 달걀 꾸러미 정도였지만 그 시절엔 그것도 큰 정성이었다.

그런데 한 해는 이를 물리치려 한 선생님이 계셨던 모양이다. 그러자 친구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돼지를 키우면서도 하루 세 번은 살펴보는데, 귀한 자식 맡겨 놓고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느냐”고. 나중에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들은 얘기다. 그런 말을 친구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어른들도 종종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당시에는 선생님에게 뭔가를 갖다 드릴 수 있는 친구 집을 부러워한 것 같다. 그러나 친구 어머니나 선생님을 나쁘게 생각한 기억은 없다. 어린 마음에도 양쪽 다 순수한 마음에서 주고받았을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주고받는 게 달걀 꾸러미가 아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선생님과 학부모의 만남이 ‘은밀한 거래’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5월 15일인 스승의 날을 옮기려는 움직임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스승의 날이 학년 초에 있다 보니 이날을 빌미로 선생님에게 내 자식 잘 봐 달라며 촌지나 선물을 주려는 학부모들이 있는데 스승의 날을 학년 말로 옮기면 그런 일이 줄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시교육청이 2월 중 하루를 정해 자율적으로 스승의 날 행사를 치르되 학생회나 청소년단체들이 행사를 주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스승의 날은 정부기념일이어서 서울시교육청이 앞장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결국은 교육인적자원부가 나서야 하는데 교육부는 시큰둥하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도 성명서까지 내 가며 반대했다. 극소수의 문제를 침소봉대해서 스승의 날을 마음대로 옮기겠다는 발상은 전체 교육자들을 잠재적 비리집단으로 모는 것이라며 서울시교육청은 그렇게도 할 일이 없느냐고 힐난했다.

이런 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우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스승의 날이 이렇게까지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 우울하고, 날짜를 옮겨서라도 스승의 날을 유지하겠다는 집착이 안타깝다.

스승의 날이 만신창이가 된 데는 우선 스승이 책임을 져야 한다. 스승이란 칭호는 그 자체가 존경의 뜻을 담고 있다. 스승은 그 이름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이럴 때면 으레 앞의 교총 성명서처럼 극히 일부 교사의 일탈을 너무 매도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나 어느 조직, 어느 직종이든 일탈하는 건 극소수다. 문제는 일탈 그 자체가 아니라 일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결하려고 노력하느냐다. 이리도 오랫동안 같은 문제로 골치를 썩이면서 ‘억울하다’고 푸념만 하는 것은 염치없다.

다음은 학부모다. 학부모들에 의한 교권 침해 사례가 늘고 있다. 선생님들에 대한 학부모의 존경심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스승의 날에만 뭔가 대가를 바라며 금품을 건네는 것도 역시 몰염치하다.

스승의 날을 옮기면 문제는 끝날까. 2월 말로 옮겨서 잡음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옮기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스승과 교단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다. 선생님들이 확고한 의지를 갖고 노력한다면 안 될 일도 아니다. 그렇게 할 의사가 없다면 굳이 스승의 날을 둘 필요가 없다. 스승의 날에 교사와 학부모가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휴교를 해 버리고, 스승이 가장 즐거워야 할 날에 오히려 스승임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마당에 스승의 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부분의 선생님은 묵묵히 교단을 지키고 계신 줄 안다. 그렇지만 왜 스승의 날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는 교단 전체가 곱씹어 봐야 한다. 결론은 세상이 투명해진 만큼 교직사회도 맑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나만 잘하면 되지 하는 생각으론 교직 전체의 신뢰를 되찾을 수 없다. 스승 스스로가 자존심 회복에 나설 때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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