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또 하나, 유권자들이 따져봐야 할 것은

  • 입력 2007년 2월 6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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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여름, 대통령 선거를 반년쯤 앞두고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미국에서 뉴욕특파원들과 만났을 때의 일이다. 휴식을 취하느라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늦게 나타난 그의 첫마디는 “장거리 비행에 피곤하니까 간단히 하자”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피로하면 대선은 어떻게 치를 것인가” 하고 묻자 그는 “전국 유세 때는 이동 중에 쉴 수 있어서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만일 대통령이 되면 그럴 시간도 없을 텐데…”라고 계속 질문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가 섭섭해할 정도로 필자가 건강에 집요했던 것은 대통령의 건강 상태가 국가에 미치는 절대적 영향 때문이었다.

국가원수의 건강 이상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일으킬 수 있고 외교에 있어서도 국가에 치명적 결과를 안겨 줄 수 있다. 1945년 이른바 얄타회담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당시 최악의 건강 상태 때문에 러시아의 스탈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만났을 때 좌중을 주도하며 기고만장하던 김정일에 비해 훨씬 고령인 DJ가 혹시 건강 때문에 기가 죽지 않을까 국민이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도자 건강이상은 국가적 재앙

우리 역사에는 병약하고 심지어 요절한 임금도 많았다. 그 옛날에는 왕이 오랫동안 병에 시달려도 가족들이 걱정하고 어의가 바빠질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통령 비서관들이 만에 하나 병 수발에 바쁘고 청와대 안이 1년 내내 한약 달이는 냄새로 진동한다면 그건 국가적으로 보통 문제가 아니다. 백성의 뜻과 무관하게 지도자가 군림하던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국가원수가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지금은 후보자의 건강도 유권자들이 심각하게 감안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미국은 대통령 후보들이 대개 자신의 병력과 건강 진단 결과를 밝힌다. 그것도 모자라 언론이 경쟁적으로 후보자의 건강 상태를 취재해 그 실상을 낱낱이 보도하기 때문에 그들의 건강 여부는 거의 완벽하게 검증된다.

신체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국가원수의 정신 건강이다. 그러나 정신 질환이나 성격적 결함은 신체 질병만큼 잘 드러나지도 않고 진단과 평가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일부 선진국은 정신과 전문의나 심리학자의 도움을 받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하는 장치를 갖추고 있다. “정책결정자가 면도날 같은 판단을 해야 할 때는 정보 자료나 현상도 중요하지만 정신 상태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나 중앙정보국(CIA)이 최종 결정을 내릴 때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는 경우가 많다”고 백상창 한국정신분석 정치학회장이자 연세대 의대 정신건강과 임상교수는 말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성격에는 정신분석적 개념이 모두 들어 있다. 성격도 정신 질환 진단의 한 요소라는 것이다. 백 교수의 저서 ‘정신분석 정치학’에 따르면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지나치게 고생했거나, 부모의 사랑이 부족했던 사람 가운데는 항공포증(counterphobia) 혹은 애정착취증(exploitation)을 보여 두려움의 대상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기존 사회를 원망하면서 애정에 인색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병적 자기애(narcissism) 때문에 자신의 가치와 업적을 지나치게 과시하고 싶어 하고 상대방의 사소한 과오도 집요하게 공격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성격이 원만하던 사람까지도 나쁘게 변화시킬 만큼 정신적 스트레스가 큰 직책이다. 누구나 국가 최고 권력자가 돼 격무에 지치고 비판여론에 시달리게 되면 분노가 휴화산 속에 갇혀 있던 용암처럼 분출되게 마련이다. 그때 제어되지 않는 무의식은 지도자로 하여금 절제되지 않은 말을 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느 것이 대통령으로서의 온전한 생각이고 어느 것이 아닌지 국민은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신체건강만큼 정신건강도 중요

현대인은 ‘가족 3대 중 한 명이 의사의 정신 건강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로 피곤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이제 유권자들은 대통령 후보자의 능력과 사상 그리고 신체적 상태뿐 아니라 그들의 인격과 정신 건강도 꼼꼼하게 따져 봐야 한다. 선진국처럼 대통령에 대한 정신과 의사의 조언을 상례화하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국민의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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