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안한다”도 번복…“사퇴 안한다” 믿을수 있나

  • 입력 2007년 1월 12일 03시 00분


코멘트
노무현 대통령이 11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어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안한 배경과 향후 추진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석동률 기자
노무현 대통령이 11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어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안한 배경과 향후 추진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석동률 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11일 야 4당이 청와대 초청 오찬에 불참하자 열린우리당 지도부와만 오찬을 한 뒤 전격적으로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독재시절의 발상”, “오만한 자세”라며 야당을 맹비난했다. 9일 대국민 특별담화 기자회견 후 불과 이틀 만이다. 노 대통령은 “개헌안이 부결돼도 임기 단축은 하지 않겠다”, “탈당은 야당이 개헌 전제 조건으로 요구해 오면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발언 중 논란이 되는 쟁점을 점검해 본다.》

●임기 단축

“임기 단축은 하지 않겠다.”

노 대통령은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 개헌이 여의치 않을 경우 노 대통령의 마지막 압박 수단으로 거론되는 ‘중도 사퇴→조기 대선 실시’ 가능성을 부인한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는 임기 중 사퇴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야권에서는 개헌안 국회 표결 전 하야 가능성이나 개헌안 부결 후 중·대선거구제와 연계하며 사퇴할 가능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

노 대통령의 미묘한 발언이 이런 의구심을 부채질하고 있다.

“개헌이 부결되면, 내가 임기를 그만두게 되면, 당연히 부결시키고 선거를 빨리 하고 싶지 않겠나.”

현 시점에서 중도 사퇴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 한나라당 설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뉘앙스다. 중도 사퇴가 한나라당 설득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그 카드를 꺼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실제로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등에선 임기 단축 카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제하에 ‘개헌안 국회 표결 전 하야’ 등의 시나리오까지 나돈다.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오늘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임기 단축 논란이 종료된 것은 아니다”라며 “개헌안이 부결되면 다음 카드는 임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같은 당 김재원 의원도 “노 대통령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느냐”며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면 임기 단축을 위한 하야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대통령은 과거 ‘개헌을 주도하지 않겠다’고 말해 놓고 지금 개헌을 제안했듯이 사임 문제도 얼마든지 말을 바꿀 수 있다”며 “개헌안이 부결되면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상황 논리를 들어 조기 하야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노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대해 “정치판을 뒤흔드는 효과도 있고 야당이 반대해 개헌이 통과 안 되면 ‘나 못하겠다’며 (대통령 직을) 내던질 경우 조기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조순형 의원도 “(노 대통령의) 다음 카드로 가장 유력한 것은 임기 단축”이라고 말했다.

야당 인사들의 이 같은 인식엔 노 대통령이 향후 사용할 수 있는 정국 돌파 카드 중에 임기 단축만큼 파괴력이 있는 게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한나라당 김정훈 정보위원장은 “탈당이나 거국내각 구성 등은 쓸 만한 카드가 못 된다”며 “개헌안이 부결되면 마지막으로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중·대선거구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부결되면 물러나겠다’고 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대체로 임기를 단축하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 발언의 진정성을 믿는다는 태도이지만 ‘혹시 모른다’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사람도 없지 않다. 천정배 의원이 “대통령이 임기 끝까지 국정 운영과 민생 안정에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고 말한 것도 거꾸로 보면 중도 사퇴 가능성에 대한 우려라고 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헌을 발의했다가 국회에서 부결되는 사태가 일어나면 상황은 또 달라진다. 대통령은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이 가속되는 등 최악의 상황에 빠질 것이다. 그럴 경우 이를 돌파할 카드로 임기 단축을 꺼내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평소 “인사권과 대통령 직이 유일한 권한”이라고 강조한 것은 곱씹을 대목이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신임 연계

노 대통령은 개헌안을 발의할 때 자신에 대한 신임을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는 한 부결되더라도 중도사퇴 등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개헌안이 설사 부결된다고 해서 대통령이 기죽을 일도 없고, 헌법상 권한이 소멸될 일도 없다”고도 했다.

‘개헌 제안과 임기 단축 문제를 연계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야당의 지적에 ‘나는 신임 문제를 여기에 걸지 않을 것이며, 신임 문제를 걸 필요도 없고, 개헌안이 부결돼도 기죽지 않겠다’고 반박한 것이다.

그러나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헌법개정안 발의권을 행사하겠다면서도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편의주의’라는 비판이 나온다.

어수영(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한국선거학회장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를 ‘통과되면 다행’이라는 식으로 툭 던진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현 시점의 개헌이 적절치 않다는 국민 대다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대 정치대학원 김형준 교수는 “헌법개정안 발의 자체가 목적이 아닌 이상 발의라는 정치적 행위와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며 “국민이 반대하는 걸 우겨서 하고, 부결돼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책임정치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권 자체가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이 따르는 고도의 정치 행위라는 게 학자들의 지적이다.

그러나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뒤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노 대통령이 신임과 연계시켜 배수진을 치는 것은 헌법 규정상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강원택 교수는 “만약 노 대통령이 자신의 신임을 국민투표와 연계한다고 했다면 엄청난 혼란이 있었을 것”이라며 “대통령이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한 이야기로 본다”고 말했다.

현행 헌법에는 특정 정책에 대한 찬반을 묻거나(헌법 72조) 개헌(헌법 130조)에 대해서만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게 규정돼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