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정태섭]새 화폐에 과학자 얼굴 올리자

  • 입력 2006년 1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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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화폐에 우리 과학자 얼굴 올리기 운동’을 2004년 2월 시작했다. 같은 해 12월에 의학계와 과학계 인사의 성원으로 2257명의 서명을 받아 한국은행에 제출했다. 아쉽게도 재정경제부가 2005년에 기존 화폐의 도안만 바꾼다는 방침을 정해 고액권 발행은 무산된 것처럼 보였다. 최근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고액권 화폐 발행을 검토하는 중이라는 보도가 나와 새로운 열의가 생긴다.

어려서부터 취미로 한국 화폐를 수집하다가 의사가 되고 의대 교수가 됐는데 1989년 처음으로 미국의 학회 발표회에 갈 때 100달러짜리 지폐를 바꾸게 됐다. 평소 과학자로 존경하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얼굴이 지폐에 보였다. 왕이나 학자의 얼굴만 보던 내게는 신선했다. 그때부터 의사이기 이전에 과학자로서의 사명감에서 과학자 얼굴이 나오는 외국 화폐를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국내에서 발행할 새 화폐에 과학자 얼굴을 넣어야 하는 이유는 국가 발전에 과학과 과학자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과학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과학자를 존경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얘기다.

유럽의 많은 국가가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데 과학자의 공이 컸음을 느끼고 이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화폐에 과학자 얼굴을 넣었다. 지금은 유로화로 통일됐지만 그 전에 사용한 유럽 18개국의 지폐 107종 중 26종(24%)에 과학자의 얼굴이 나온다. 산업혁명을 시작한 영국은 4종의 지폐 중 3종에 과학자 얼굴을 채택했다.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라는 점 이외에는 이스라엘과 전혀 관계 없는 아인슈타인의 얼굴을 1968년에 5리로트 지폐에 올려 과학에 대한 국가적 집념을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위인은 한 나라의 지폐에만 나오는데 폴란드 출신인 퀴리 부인은 프랑스 500프랑과 폴란드 2만 즈워티에 같이 나온다. 일본은 2004년 1000엔짜리 지폐에 의학자인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의 얼굴을 넣었다. 훌륭한 과학자를 그 나라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한 국가적인 노력이다.

한국이 성장하는 데 원동력을 제공했던 많은 과학자가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계기로 연구원을 그만두는 등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후배 이공학도들은 과학에 대한 동경심과 미래를 빼앗겼다. 이런 분위기가 이공계 지원자의 격감으로 나타났다. 과학도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국가의 얼굴인 화폐에 국내 과학자의 얼굴을 올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화폐는 나라의 얼굴과 같다. 화폐수집가뿐만 아니라 외국을 여행하는 사람은 각국의 화폐와 등장인물의 배경을 이해하면서 국가의 정체성과 미래를 생각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국가이자 경제 규모가 세계 11위로 성장한 한국의 화폐에 과학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외국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 존경받는 한국 과학자의 얼굴을 화폐에 올려서 한국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보여 주자.

국내의 이공계 기피 현상은 과학과 과학자를 등한시해서 생기는 후유증이다. 과학자가 국민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사회는 과학을 통한 국가발전이 힘들다. 우리 역사에도 훌륭한 과학자가 많으니 존경하는 풍토를 만들 때가 왔다. 천출에서 종3품의 관직에 오른 과학자 장영실은 귀감으로 삼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새 화폐에 그의 얼굴이 오르기를 기대한다. 이공계 기 살리기도 새 화폐에 과학자 얼굴을 올리는 데서 시작하자. 국내 과학자가 자부심을 갖고 연구에 전념하기를 바란다.

정태섭 연세대 의대 교수 영동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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