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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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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최대의 회계 부정 스캔들로 몰락한 에너지 기업 엔론의 전 최고경영자(CEO)가 24년 4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엉뚱하게도 화장하는 여성의 고충이 떠올랐다. 화장은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 책임하에 한다지만 분식(粉飾)회계를 일삼는 기업인의 심리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화장의 미덕을 폄훼할 뜻은 정녕 없지만 화장과 분식 사이에는 통하는 점이 적지 않다.
화장을 잘만 하면 얼굴의 잡티를 숨기고 코를 실제보다 높게, 눈을 크게 보이게 할 수 있다. 교묘한 분식회계는 속이 텅 빈 기업을 알짜 기업으로 위장한다. 짙은 화장은 일시적이나마 약점을 감춘다. 분식회계도 당장은 투자자를 속일 수 있다. 화장이 짙을수록 피부는 숨을 쉬지 못해 손상된다. 분식회계가 길어질수록 기업도 속으로 골병이 든다. 화장한 얼굴로 평생을 살 수 없듯이 분식회계의 속임수도 언젠가는 탄로 난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비판받는 것은 규제, 코드, 인기영합, 시장 무시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많은 정책 가운데 잘한 것이 어찌 단 한 가지도 없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금융감독위원회가 지난해 3월 발표한 ‘분식회계 자진신고 기업에 대한 특례조치’를 괜찮은 정책의 표본으로 꼽고 싶다. 2006년 말까지 과거의 분식 사실을 고백한 기업에 대해서는 금융감독원의 회계 감리를 면제해 주고 집단소송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다.
도입 당시 일부 시민단체는 ‘탈법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셈’이라며 반대했다. 여론의 호응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정책은 정권 핵심부의 코드와 거리가 멀고, 인기영합 혐의에서도 자유롭다.
금융 당국이 이 정책을 시행한 것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기업이 분식회계를 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행위는 괘씸하지만 이참에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털고 넘어가 2007년 이후 한국 경제를 교란할 불씨를 원천적으로 없애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데드라인이 올해 말로 다가오면서 몇몇 기업이 자발적으로 회계 기준 위반 사항을 공개하고 수정했다. 그러나 고해성사 실적은 금융 당국의 ‘예상 기대치’에 크게 못 미친다. 한 고위 당국자는 “진짜 투명해서 안 하는 건지, 아니면 분식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갈 작정을 한 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화장과 분식회계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화장은 잘못돼도 자신의 피부에만 부작용을 남기지만 분식회계는 선량한 다수의 투자자를 등치는 범죄행위라는 점이다.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 그대로 잠자리에 드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얼굴이 가렵고 불편해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다. 금융 당국의 유예 조치는 분식회계 기업의 오너와 CEO에게 질 좋은 클렌징 비누를 무료로 준 것과 같다.
기한은 이제 한 달 반밖에 남지 않았다. 좀 이른 얘기이긴 하지만 새해엔 시장에서 ‘생얼’ 기업하고만 만나고 싶다.
박원재 특집팀 차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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