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영균]30년 전의 감동

  • 입력 2006년 11월 5일 19시 41분


의료보험이 시작된 때는 1977년이다. 전국적으로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매달 소액의 보험료만 내면 거의 무료로 병원에 갈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서민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 뒤 1989년부터는 전 국민으로 대상이 확대되어 누구나 복지국가의 혜택을 실감할 수 있게 됐다.

과거 병원 문턱이 높았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안다. 어렸을 적 병원 신세를 자주 졌던 기억이 있다면 더 실감이 날 터이다. 그래서 많은 국민이 매달 많든 적든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고 있다. 그런데 복지국가라는 선진국에선 이런 사회보험이 적자투성이 애물단지로 바뀌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부담스러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으니 걱정스럽다.

세금보다 무서운 보험료

심지어는 이런 사회복지제도가 고맙지만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올 7월 동아일보에 ‘요즘 자영업자 한숨을 팝니다’라는 제하의 기사가 나간 뒤 독자들이 들려준 얘기다. 지방에서 식품가공업을 하는 한 독자는 어느 날 갑자기 대리점 주인들이 사업자등록증을 반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한 달 전쯤 새로 문을 연 대리점이,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반납한다니 가슴 철렁할 일이 아닌가.

사연인즉 사업자등록을 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등을 내라는 고지서가 날아왔다는 것이다. 아직 매출을 제대로 올리지도 않았는데 수십만 원의 보험료부터 내라니 차라리 사업을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얘기다. 대부분 부업으로 가계를 도우려고 시작했던 주부들이 손을 들고 만 것이다. 세금은 장사를 하고 돈을 벌어야 내는데 보험료는 돈 벌기도 전에 내라고 하니 세금보다 무서울 수밖에.

고맙기만 했던 의료보험이 세금보다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은 의료보험의 재정 사정과 관련이 있다. 보험 재정이 적자가 되면 보험료를 더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강보험 재정이 나빠져 4년 만에 약 2000억 원의 적자가 예상되고 내년에는 적자가 더 늘어난다고 한다. 유시민 장관이 보건복지부를 맡은 뒤 바로 적자가 된 것이다.

몇 해 동안 별일 없이 흑자를 내던 재정이 왜 하필이면 장관이 바뀌자마자 적자가 되었을까. 고령화로 의료비 지급이 늘어나고 보험료는 잘 걷히지 않는 탓도 있지만 보험 혜택을 무리하게 늘렸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환자 식대나 1∼3인실 병실료 등에 대한 보험 혜택이 바로 그런 사례들이다. 한마디로 건강 재정을 책임져야 할 보건복지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이다.

유시민 장관 맡은 뒤 적자난 건강재정

보험 혜택을 늘렸으면 보험료를 올려 적자를 막는 게 정답이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색다른 방법을 택했다. 보험료를 조금만 올리고 민영의료보험에 책임의 화살을 돌렸다. 요컨대 민영의료보험이 건강보험 적자의 주요인이니 민영의료보험의 기능을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국가보험과 민간보험의 싸움에 누구 편을 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국가보험과 민간보험 중 어느 쪽이 국민에게 더 혜택을 주는지는 국민이 선택할 것이다. 다만 국민의 선택권마저 제한하려는 것은 불공정하다. 민간보험 때문에 국가보험이 적자가 났다는 주장은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국민과 민간보험회사들을 설득할 수 있을 터이다.

국민연금 개혁안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임명된 유 장관은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연금 개혁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국민연금 개정안은 정기국회를 통과하기 힘들어 보인다.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신뢰를 얻는 첩경은 30년 전 의료보험이 처음 시작될 때처럼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다. 그것은 무리하게 보험 혜택을 늘리는 게 아니라 보험 재정을 튼튼히 하고 보험료를 저렴하게 하는 일이 아닐까.

박영균 편집국 부국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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