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임규진]투자자들의 고마운 사전경고

  • 입력 2006년 10월 18일 03시 00분


물리적 현상인 ‘핵폭발’과 경제적 현상인 ‘경제위기’는 비슷한 점이 많다.

핵폭발을 보자. 농축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원자 하나가 핵반응을 시작하면 나머지 원자들이 잇달아 핵반응을 한다. 원자 덩어리가 통제되지 않은 채 연쇄 핵반응을 급격히 일으키면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 핵폭발은 그 자체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며 후유증은 더욱 가공할 만하다.

코스모스의 저자인 칼 세이건(1934∼1996) 박사는 전면적 핵전쟁에 따른 재난을 연구했다. 그는 미국과 구(舊)소련의 핵무기 절반이 폭발하면 수억 명이 즉시 사망하고 4개월 뒤 지구기온이 영하 25도에 달하는 빙하기가 도래한다고 예측했다. 인류 절멸의 ‘핵겨울’이다.

1997년에 겪은 외환위기를 보자. 경제 악재(惡材)가 통제되지 않은 채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환란(換亂)이 일어났다. 임기 말 레임덕을 맞은 정권은 리더십을 잃은 상황이었다. 방아쇠는 외국인투자가들이 당겼다. 이들이 달러 빚 환수에 나서자 누적된 악재가 연쇄 핵반응을 일으켰다.

위기가 터진 뒤 수많은 기업이 공중분해됐고, 수십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후 수년간 국민은 실업과 빈곤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경제의 핵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북한 핵실험은 물리적 경제적 측면 모두에서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햇볕정책은 봄바람이 아니라 눈보라를 몰고 온 셈이다.

당장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 미국의 핵우산(核雨傘) 때문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쏘면 미국의 핵 보복으로 북한 역시 잿더미가 된다. 모든 리스크(위험)를 반영하는 주가와 환율, 금리 등 금융지표도 최악의 상황을 배제한 채 움직이고 있다.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핵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정했다. 금융계와 산업계 모두 핵우산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경제위기의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우선 지금의 경제상황이 외환위기 때와 닮았다. 정권의 거듭된 실정(失政)으로 경제는 이미 저(低)성장의 겨울 초입에 있다. 레임덕에 빠진 정권이 내년 대선 국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핵실험이란 최악의 악재가 터졌다.

이번에도 국내외 투자자들이 위기의 방아쇠를 쥐고 있다. 한미동맹 약화로 한국경제의 국제적 고립이 진행되고, 북한의 핵 도발 가능성이 커지면 투자자들은 외환위기 때처럼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자본의 해외 이탈 등 경제 악재가 연쇄 핵반응을 일으키며 미증유의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는 10일 “정부는 우방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경제적 악영향을 최소화하라”고 요구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원로자문단(좌장 남덕우 전 국무총리)도 11일 “한미동맹과 국제공조를 공고히 해 안보 불안을 해소하라”고 주문했다. 보스턴컨설팅 관계자는 16일 “뉴욕과 런던의 투자자들이 의사결정의 타이밍을 고르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외 투자자들이 ‘한미동맹이라는 마지막 안전판마저 흔들리면 한국을 탈출하겠다’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현 정권은 투자자들의 경고를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외환위기 때는 사전경고도 없었으니 말이다.

임규진 경제부 차장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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