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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9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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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부 외교관 사이에서 도는 이 얘기는 작금의 한반도 주변 외교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한 고참 외교관은 이를 ‘웨이팅 게임(Waiting Game)’이라고 표현했다.
한 나라의 외교정책은 지도자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박정희 시대 이후 한국 외교를 가장 출렁이게 했던 것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공약이었다. 한국 정부는 물론 미국 조야(朝野)에서도 말렸고, 결국 카터는 주한미군을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명예로운 퇴로’를 찾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 부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 등 ‘개성’ 강한 지도자들의 외교정책에는 퇴로가 없다. 껄끄러운 상대와의 외교는 사실상 포기하고, 후임자를 기다리는 편이다. 청와대는 지난여름 현직인 고이즈미 총리를 두고도 ‘고이즈미 후임과의 한일정상회담 개최 추진’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외교를 바라보는 국민도 내심 포기하고픈 심정이다. 특히 한미관계에 대해선 “차기 정부에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리지만 말아 달라는 게 솔직한 생각”이라는 사람이 많다. 국민과 노무현 정권이 또 다른 ‘웨이팅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노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핵심은 게임에 능하다. ‘헌법처럼 바꾸기 힘든 부동산 정책’을 만들고, 헌법재판소장의 임기를 기필코 6년으로 채우며, 수십 년짜리 계획인 ‘국방개혁 2020’이나 ‘비전 2030’을 밀어붙이고, 2012년에 환수하려는 전시작전통제권의 협상을 임기 내에 마무리해 ‘노무현 이후’를 기다리는 국민과의 게임에서 승리하려 한다.
이 때문에 ‘한미관계도 차기 정권에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몰고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는 더욱 커진다. 전문가들이 꼽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 가운데 최악은 50년 한미동맹의 근간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손대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정설이지만, 두 나라가 동맹의 성격을 변화시킬 전시작전권 협상을 서두르는 마당에 못할 것 없다는 관측도 있다.
차악(次惡)은 2008년 말까지 2만5000명이 남는 주한미군의 추가 감축이다. 벌써 미국 내 많은 군사전문가는 ‘전시작전권 이양에 따른 전략적 유연성 확보를 위해 추가 감축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 다음 심각한 사안인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이 오히려 ‘옜다, 받아라’ 식으로 2009년 이양을 들이밀며 노 대통령 임기 내에 협상을 매듭지으려 하기 때문이다.
보수단체에서는 벌써 ‘재협상’ 얘기가 나오지만, 상대가 있는데 재협상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상대가 미국이라면 말이다. 특히 대선 국면에서는 전시작전권 문제를 파고들수록 현 정부의 경제 실정(失政) 책임론이 희석될 가능성이 높다. 이래저래 치자(治者)와 ‘웨이팅 게임’을 벌여야 하는 백성들의 처지는 피곤하고 답답하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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