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기홍]국정에도 ‘경고문’이 필요하다

  • 입력 2006년 8월 2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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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에 온 지 이제 한 달 남짓. 낯선 땅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다. 가전제품을 사도 매뉴얼이 두껍고 복잡해 사용법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매뉴얼의 상당 부분은 ‘안전 지침(safety instructions)’인데 읽다 보면 ‘굳이 이런 것까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얼마 전에 산 전화기 매뉴얼만 봐도 그렇다. ‘흔들리는 스탠드 위나 욕조, 수영장 바로 옆에 전화기를 놓지 마시오’ ‘번개가 칠 때는 설치하지 마시오’….

1960년대부터 제조물책임(PL) 관련법을 시행해 온 미국에서 기업들은 예상 가능한 모든 위험에 대해 미리 경고함으로써 만일의 책임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다 보니 ‘하늘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는’ 과민한 경고문이 숱하다. ‘미시간 소송 남용 감시’란 단체가 매년 실시해 온 ‘황당한 경고문(Wacky Warning Labels) 콘테스트’에서 올해 1등은 페인트 제거용 섭씨 538도짜리 열선총(熱線銃)의 경고문이 차지했다. ‘헤어드라이어로 사용하지 마시오.’

2위인 부엌칼의 경고문은 ‘칼이 떨어질 때 잡으려 하지 마시오’다. 3위는 지도 그림이 인쇄된 칵테일용 냅킨에 적힌 ‘항해용으로 사용할 수 없음’이란 경고문이 차지했다. 그 밖에도 ‘옷을 입은 채 다림질하지 마시오’(다리미), ‘이 옷을 입는다고 날 수 있는 건 아님’(슈퍼맨 복장)…. 과민 경고문 리스트는 끝이 없다.

소송 만능 사회에서 빚어지는 허무개그 같은 단면이라고 웃어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행동의 결과에 대한 인간 예측력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라크 내전의 위험에 대해 나도 우려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1일 기자회견에서 이라크의 내전 가능성을 처음으로 시인했다. 개전 43일 만인 2003년 5월 1일 항공모함 위에서 승전 선언을 하던 모습이 교차돼 떠오른다. 당시 그는 이라크전쟁의 수렁에 빠져 지지율 30%대에서 헤매고 있는 현재 모습을 상상이나 해 봤을까.

사실 이라크전쟁의 기획자들은 한결같이 최고 전략가들이었다. 네오콘(신보수주의자) 그룹의 핵심 리더로 전쟁의 주무 기획자였던 폴 울포위츠 당시 국방부 부장관에게는 ‘불가예측성을 예측하는 예지력, 지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을 지닌 최고 전략가’란 평가가 따라다녔다. 네오콘 가운데 아이비리그 출신이 아닌 경우를 찾는 것이 힘들 정도다.

그러나 그 수재들, 전략의 귀재들도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 후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수년 동안 주도면밀하게 전쟁을 기획했는데도 그들 가운데 지난 3년간 벌어진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갈등의 함수관계, 이라크 민중의 그 복잡다기한 반응을 예측한 전략가는 없었다.

최근에 만난 싱크탱크의 연구원은 “부시 정권 엘리트들의 특징은 현실의 함수관계를 압도하는 관념, 이상론”이라고 말했다. ‘중동 민주주의 확산론’에서 최근의 ‘부패정치(kleptocracy)와의 투쟁론’에 이르기까지 선명한 정치적, 이념적 목표를 내걸고 주도면밀한 로드맵을 만들어 내는 듯한데 현실에선 예상 밖의 결과물들에 걸려 허우적댄다는 설명이었다.

워싱턴에 온 지 한 달 남짓. 그동안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얘기는 역시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도 대비했는지” “안보와 경제에 미칠 온갖 변수를 다 검토했는지”…. 일부러 특정한 성향의 사람들을 골라 만난 것도 아닌데, 걱정 섞인 의문을 던지는 한반도 전문가가 많았다. 이념적 지향점은 극과 극이지만 “결국 내가 옳다는 게 증명될 것”이란 확신에 관한 한 한미 양국의 두 정권은 쏙 빼닮았다. 두 정권에는 차라리 ‘황당 경고문’을 만드는 기업들의 과민함이라도 필요한 게 아닐까.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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