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明나라와 미국

  • 입력 2006년 8월 10일 03시 03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 패하지 않았다면 과연 61년 전 우리의 독립이 가능했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광복절을 앞두고 꼬리를 무는 상념은 임진왜란 무렵으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도 명(明)나라가 아니었다면 조선은 산하를 보전하기 어려웠다.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은혜라는 뜻이다. 명의 원병 덕분에 가까스로 종묘사직을 지킨 조선은 그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임진년에 명나라 군대가 우리나라로 오게 된 것은 그 공이 오로지 (명의 병부상서) 석성(石星) 한 사람에게 있었으니, ‘재조’라는 은공은 오직 석성에게만 해당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선의 구원 요청에 명의 조정에선 “스스로 왜(倭)를 무찌를 일이지 어찌 감히 대국을 귀찮게 한단 말이냐”는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으나 석성은 조선을 돕는 동정(東征)을 홀로 주장해 황제인 신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석성의 계부인(繼夫人) 중국인 류(柳) 씨는 결혼 전 가문이 몰락하자 부모의 이장(移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청루(靑樓)에서 몸을 팔았다. 그때 사신을 따라 명에 갔던 조선 역관 홍순언이 딱한 사정을 알고서 거금을 주고 류 씨를 구했다. 류 씨는 그 뒤 석성의 계부인이 됐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석성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의인(義人)의 나라 조선을 도와 은혜를 갚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막대한 군비 조달 문제가 불거지자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했다가 모함을 받고 옥사(獄死)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석성의 측근 문인은 조선 조정에 구명(救命) 외교를 벌여 줄 것을 간청했으나 외면당했다. 선조는 대신들과 몇 차례 논의한 끝에 명의 조정이 결정한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해 끝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배은(背恩)이었다.

그런 부담 때문이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석성의 제사와 신원(伸寃) 문제는 광해군 인조 정조 때까지도 논의가 된다. 정조는 “석 상서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갚지 못했다”며 “그의 죽음은 곧 우리 때문”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에 보낸 원병은 21만이 넘고, 군량을 사들이는 데 쓴 은(銀)은 883만 냥이 넘는다는 기록이 있다.

미국이 6·25전쟁 때 파병한 병력은 연 178만9000명으로 이 중 3만3686명이 전사했고, 3254명이 질병, 사고 등으로 숨졌다. 실종자는 3737명, 부상자는 9만2134명에 이르렀다. 미국은 6·25 군비(軍費)로 약 3500억 달러를 썼다. 시대가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명나라가 조선을 위해 쓴 비용보다 훨씬 많음은 분명하다.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명에서 원병 문제로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이란 신생 독립국을 잘 알지 못하던 미국에선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값비싼 희생을 치르는 데 대해 반대하는 여론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어려웠을 때 도와준 은혜를 잊어서는 곤란하다. 지금도 미국의 도움 없이는 나라를 지키고, 국위(國威)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자위(自衛) 능력의 한계도 생각하지 않고 동맹을 가벼이 여기는 정권의 무책임함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