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사회가 가야할 길’ 세계 석학 하버마스에 듣는다

  • 입력 2006년 5월 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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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하버마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소통의 정치’가 제대로 실현되려면 그 전제 조건으로 “폭력, 허위 선전 선동, 상호 비난, 탈정치화한 오락산업이 정치적 공론장을 물들이는 것부터 차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제공 한상진 교수
위르겐 하버마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소통의 정치’가 제대로 실현되려면 그 전제 조건으로 “폭력, 허위 선전 선동, 상호 비난, 탈정치화한 오락산업이 정치적 공론장을 물들이는 것부터 차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제공 한상진 교수
《사회학자인 한상진(韓相震) 서울대 교수가 최근 독일을 방문해 위르겐 하버마스(77)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와 대담을 했다. 뮌헨 근처 슈타른베르크에 있는 하버마스 교수의 자택에서 3시간에 걸쳐 세계적인 문제들과 한국 지식사회의 관심사 등에 관해 논의했다. 한 교수는 1996년 한국을 방문했던 하버마스 교수에게 두 번째 방한을 요청했고, 하버마스 교수는 2007년 10월 방한을 약속했다. 하버마스 교수는 자신의 이력에 단 6개의 해외 강의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로 1996년 서울대 서남강의를 꼽을 만큼 한국 지식사회에 관심과 호감을 갖고 있다고 한 교수는 전했다. 3월부터 교환교수로 중국 베이징대 사회학과에서 ‘국가발전과 중간계급’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는 한 교수가 하버마스 교수와의 대담 내용을 정리해 보내 왔다.》

―당신이 옹호하는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에 대한 첨단기술의 도전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생명윤리 문제의 합리적 해결이 가능할까요.

“기술적 진보는 항상 십자가 성호처럼 (처형과 부활, 증오와 사랑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집니다. 일례로 텔레비전은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정보와 계몽을 통해 합리적인 의사 형성을 가능하게 하지만 대중 선동에 남용되면 사람들을 오도하고 탈정치화하죠. 기술적 진보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중요하고 그런 맥락에서 생명윤리의 합리적 해결도 가능합니다. 유전공학과 인공지능은 우리가 이룩해야 할 도덕적 합의에 의해 분명하게 정의된 영역에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치료를 위해 사용해야지 우생학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오늘날 ‘진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민주주의적 법치국가에서 국민 주권과 인권을 제도화하는 것, 적극적 시민사회, 기능을 다하는 공론장(公論場) 그리고 자유주의적 정치화를 뜻합니다. 자기 결정과 자기 실현의 에토스, 만민 존중의 도덕, 종교적 자유, 남녀평등, 학문과 연구의 자율성 같은 가치 지향은 18세기부터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돼 왔어요. 이런 것이 오늘날에도 정의롭지 못한 사회관계, 사회 병리, 전쟁 범죄, 인종 학살 등에 대한 비판의 척도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진보진영이 비판의 역할에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게 되면 여러 난제에 직면합니다.

독일 뮌헨 인근 슈타른베르크에 있는 위르겐 하버마스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오른쪽)의 자택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상진 서울대 교수. 사진 제공 한상진 교수
“당신의 질문은 불투명한 사회관계의 복잡성에 관련된 우리의 무능력에 관한 얘기군요.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있습니다. 우선 세계적인 문제로서 수자원 부족, 온난화, 홍수, 대기오염 등의 생태적 불균형이 예죠. 궁극에는 파멸을 초래할 세계 각 지역 간의 불평등 문제, 석유처럼 거의 고갈된 자원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계적 위기를 의식했다고 해서 개별 국가가 자기 집 마당에서 겪고 있는 문제들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경우, 북한 문제, 민족 화해와 통일, 지속적인 민주화의 과제가 남아 있고 책임성, 투명성의 국제규범을 사회 전체에 확산시키는 과제도 중요하죠.”

―당신이 25년 전에 펴낸 역작 ‘의사소통행위이론’이 최근 한국에서 완역돼 많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당신이 말하고자 한 핵심은 무엇이었나요.

“나의 주장은 국가권력이나 자본주의 경제의 역동성만이 아니라 전통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의사소통의 성찰 능력이 갈수록 현대의 특징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의사소통의 합리성은 법과 도덕, 과학과 철학, 예술과 비평 같은 문화적 업적에도 드러나지만 시민들의 민주적 의지 형성에도 깊게 작용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세계 도처에서 갈등이 분출하고 있지 않나요.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자유로운 정치문화를 전제로 합니다. 정치적 반대파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종교적 소수파와 외국인에게 관용을 베풀며, 애국주의가 다른 민족에 대한 멸시로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또 시민의 에티켓을 공유하는 시민사회의 존재도 중요하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과 직결된 정치적 목표를 근시안적으로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정치투쟁은 권력과 이익을 위한 투쟁입니다. 그러나 민주적 입헌국가의 위대한 성과는 정치적 공론장을 통해 이 투쟁을 여과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모든 정파와 주장이 공개적인 정당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에서 ‘소통의 정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소통을 위해서는) 정치적 공론장에서 올바른 의제들이 다뤄지고 최선의 논증이 가동되는지, 아니면 통제되지 않은 폭력, 허위 선전 선동, 상호 비난, 탈정치화한 오락산업이 판을 치는지가 중요합니다. 왜곡된 공론장에서 대중매체는 파괴적 힘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토론정치(deliberativer politik)’를 강조하는 까닭은 정치적 권력투쟁이 논쟁을 통해 제어되고 순치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직 논증을 통해서만 민주주의가 정당성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당신은 미국의 이라크전쟁을 준엄히 비판했는데 미국의 바람직한 역할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미국이 제1, 2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과 루스벨트 대통령이 모범적으로 수행했던 세계정치 역할로 돌아가는 겁니다. 미국은 유엔 개혁의 정점에 서서 세계 정치질서의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런 이중 잣대 없이 국제 안정과 세계 차원의 인권 실현을 위해 애써야 해요.”

―미국이 군사적 패권을 장악한 것과 함께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탈출구는 없을까요.

“내가 보는 현대 사회는 자본과 시장, 정치권력과 조직 그리고 가치·규범·소통을 통한 연대로 운영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권력은 자본주의 발전의 마지막 물결, 즉 정치적으로 의도된 시장의 세계화 과정에서 균형을 잃었습니다. 그 결과, 국가는 이제 공공 서비스, 사회복지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킬 만한 자원을 갖고 있지 못해요. 세 가지 권력 사이에 다시 적절한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가치관과 재결합된 민주주의 정치가 시장의 ‘뒤를 쫓아 성장’해야 할 상황입니다. ‘국민국가를 넘어선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국제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구 생태와 세계 경제의 문제에 대한 일종의 ‘세계적 내정(內政)’이 필요합니다.”

■ 하버마스 누구인가

생존한 지성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히는 위르겐 하버마스는 1929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대와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철학과 사회학 교수를 지냈다. 젊은 시절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창시자로 꼽히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제자로서 현대자본주의를 비판해 온 ‘비판이론’의 적자로 유명했다. 그러나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등장한 이후에는 이에 맞선 논쟁을 통해 ‘서구 합리주의의 마지막 보루’라는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합리적 의사소통의 가능성과 능력만이 자본과 권력의 기계적 메커니즘으로부터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활세계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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